방랑시인 김삿갓 (1) 밝혀진 집안 내력의 비밀. 어머니로부터 조부(祖父) 김익순에 대한 내력을 듣게 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꺽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와 전혀 다른 실성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자, 병연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4) 月白雪白 天下地白 ...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얗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사용하던 것처럼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장판은 거울처럼 번들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 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 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허나, 이 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방랑시인 김삿갓 (65) 벽제관에서 옛 일을 회상하며 만난 선풍도인(仙風道人) 북쪽으로 북쪽으로만 길을 가던 김삿갓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길을 가던 초립 동이를 보고 물었다. "날이 저물어 어디선가 자고 가야 하겠는데, 이 부근에 절이나 서당 같은 것이 없느냐?" "절이나 서당은 없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벽제관(碧蹄館)에 주막이 있어요." 김삿갓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럼 여기가 바로 벽제관이란 말이냐?" 이곳이 벽제관이라는 소리에,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78) 도루아미타불의 본뜻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세상사람들은 그 경문을 "바라경"이라고 불러 오게 되었다고 일휴 스님이 말하자, 좌중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리고 일휴 스님에게 다시 묻는다. "하하하, 스님은 마치 남에 일처럼 말하고 있지만 , 사실은 바라경을 지은 사람은 일휴 스님 자신이 아니오 ? " 그러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는 남녀 관계를 모르지는 않지만 , "바라경"을 지은 사람이 나 자신은 아…
방랑시인 김삿갓 (81) 취향정 수안댁의 폭탄선언 곤혹스럽기는 김삿갓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분위기를 눙치기 위해 너털웃음을 웃어 보였다. "아 사람들아 ! 술은 안 마시고 무슨 장난이 이렇게도 심하단 말인가 ?" 그러자 조조가 다시 손을 내저으며, "자네는 끼어들 계제가 아니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게 ! 자, 수안댁은 우리들의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을 하겠노라고 약속해 줄 수 있겠지 ? " 수안댁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좋아요. 약속할께요." "그럼 됐…
방랑시인 김삿갓 (86)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이 보이지 않았다. "응 ... ?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 " 김삿갓은 방안을 두루 살폈으나, 마누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짓문 너머 윗방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옅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수안댁이 바람벽에 산신 탱화를 걸어 놓고…
방랑시인 김삿갓 (91) 어느새 백발이 김삿갓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수안댁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해졌다. "여보게 주모 ! " "왜 그러세요 ? " "나, 술 좀 더 갖다 주게." "그렇게 많이 드셔도 괜챦으시겠어요 ? " "술값 못 받을까 봐 걱정이 되나 ? “ "엉뚱한 오해는 마세요. 술값 못 받을까 봐 손님에게 술 안드리도록 쩨쩨한 여자는 아니에요." 주모가 술을 갖다 주자 김삿갓은 연달아 술을 마셔댔다. 깨끗…
방랑시인 김삿갓 (110) 누워있던 남자를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는 신약(神藥) 필봉은 두 남녀 사이에 시선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고 누이동생에게 말한다. "아마 너의 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랫마을에 놀러 갔는가보구나." 이렇게 까지 말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참, 여정(與情)아 ! 이리와 이 어른께 인사 올려라. 이 어른은 학문이 매우 높은 어르신네다. 이번에 나를 대신해 훈장자리를 맡아 주기로 하셨다." 그러면서 김삿갓에게는, "이 아이는 나의 누이동생인 홍 향수(洪…
방랑시인 김삿갓 (174) 인풍루에서 만난 여인 김삿갓은 인풍루 누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에 취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보니, 인풍루 처마에는 석양빛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어허! 시각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주위를 둘러보니, 오늘따라 날씨가 따뜻한 탓인지 인풍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아낙네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강계는 색향고을인지라, 오르락 내리락하는 아낙네들은 한결같이 미인이었다. (강계에는 미인 아닌 여인이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림이 없…
방랑시인 김삿갓 (184) 홍성 땅을 떠나며 김삿갓은 외가댁에는 찾아가지도 않고, 날마다 객줏집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외가에 가지도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홍성 땅을 떠나는 편이 좋으련만, 무엇인가 마음을 끌어 당기는 것이 있어 홍성 땅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4,5일을 보낸 뒤, 김삿갓은 취중에 문득,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홍성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 무덤이라도 한번 찾아보고 떠나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술을 한 병 들고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고암리의 공동묘지를 찾기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