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 밝혀진 집안 내력의 비밀. 어머니로부터 조부(祖父) 김익순에 대한 내력을 듣게 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꺽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와 전혀 다른 실성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자, 병연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9) 와청서원에 우성유라... 한가로이 누워 있자니 서원의 빗소리가 그윽하도다. 금강산은 독특한 풍경을 자랑하는 산이다. 봄은 마치 앙증맞은 십 대 이십 대 아가씨처럼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치장하여 금강산(金剛山)으로 불리고, 여름은 한여름 억세게 자라나는 명아주처럼 생활력이 왕성한 삼사십 대 여성으로 보아 봉래산(逢萊山) 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 불리는 이름은 풍악산(楓嶽山) 이라 하는데 이것은 인생의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오륙십 대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인생의 행로를 비유한 것이리라. 겨울에는 개골산…
방랑시인 김삿갓 (15) 시승과의 문답 노승 .. 조등입석 운생족 (朝登立石 雲生足)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면 구름이 발밑에서 일어나고 삿갓.. 모음황천 월괘순 (暮飮黃泉 月掛脣)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도다. 노승.. 간송남와 지북풍 (澗松南臥 知北風) 물가의 소나무가 남쪽으로 엎드려 있으니 북풍이 주는 것을 알겠고 삿갓.. 헌죽동경 각일서 (軒竹東頃 覺日西) 마루의 대나무 그림자가 동쪽으로 기우니 날 저무는 것을 알겠노라. 노승.. 절벽수위 화소립 (絶壁雖危 花笑立) 절벽은 …
방랑시인 김삿갓 (41) 소에게 맡긴 판결과 쥐구멍 사건 "무슨 부탁을...." "선생이 관북천리를 유람하시기를 단념하시고 우리 고을에 길이 머물러 주시면 저로서는 그 이상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말씀인즉 고맙습니다. 허나, 역마살에 치인 기러기 같은 넋을 타고난 사람보고 한곳에만 머물러 있으라 하시는 말씀은 무리한 말씀입니다. 얼마간 술이나 더 얻어먹다가 떠나가게 해주소서." "선생! 문천 고을은 제가 관할하는 고을 올시다. …
방랑시인 김삿갓 (61) 오얏나무 이씨 조선, 한양의 풍수와 인심 참담한 가슴을 안고 남한산성을 내려온 김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봄도 무르익어 이 집 저 집 담장마다 복사꽃과 오얏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얏나무는 이씨 조선과 인연이 깊다. 김삿갓은 李씨를 뜻하는 성씨가 "오얏나무 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엽 공민왕 때, 그 당시 한양 땅에는 난데없이 오얏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
방랑시인 김삿갓 (81) 취향정 수안댁의 폭탄선언 곤혹스럽기는 김삿갓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분위기를 눙치기 위해 너털웃음을 웃어 보였다. "아 사람들아 ! 술은 안 마시고 무슨 장난이 이렇게도 심하단 말인가 ?" 그러자 조조가 다시 손을 내저으며, "자네는 끼어들 계제가 아니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게 ! 자, 수안댁은 우리들의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을 하겠노라고 약속해 줄 수 있겠지 ? " 수안댁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좋아요. 약속할께요." "그럼 됐…
방랑시인 김삿갓 (86)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이 보이지 않았다. "응 ... ?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 " 김삿갓은 방안을 두루 살폈으나, 마누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짓문 너머 윗방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옅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수안댁이 바람벽에 산신 탱화를 걸어 놓고…
방랑시인 김삿갓 (91) 어느새 백발이 김삿갓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수안댁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해졌다. "여보게 주모 ! " "왜 그러세요 ? " "나, 술 좀 더 갖다 주게." "그렇게 많이 드셔도 괜챦으시겠어요 ? " "술값 못 받을까 봐 걱정이 되나 ? “ "엉뚱한 오해는 마세요. 술값 못 받을까 봐 손님에게 술 안드리도록 쩨쩨한 여자는 아니에요." 주모가 술을 갖다 주자 김삿갓은 연달아 술을 마셔댔다. 깨끗…
방랑시인 김삿갓 (100) 황해감사 이율곡의 동기(童妓) 유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시 술집 무하향을 나온 김삿갓은 구월산을 향해 가면서 웬일인지 마음이 지극히 허전하였다. 그런 탓 인지 주위의 산천 경계를 아무리 살펴 보아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럴까. 호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마음이 이토록 심란해진 것일까?) 돌아보건데, 어제 보던 산천 초목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을 리가 만무하다. 산도 어제 보던 그 산이요, 물도 어제 흐르던 그 물이다. 어제만 해도 그처럼 아름다워 보이던 산천초목이었…
방랑시인 김삿갓 (110) 누워있던 남자를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는 신약(神藥) 필봉은 두 남녀 사이에 시선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고 누이동생에게 말한다. "아마 너의 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랫마을에 놀러 갔는가보구나." 이렇게 까지 말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참, 여정(與情)아 ! 이리와 이 어른께 인사 올려라. 이 어른은 학문이 매우 높은 어르신네다. 이번에 나를 대신해 훈장자리를 맡아 주기로 하셨다." 그러면서 김삿갓에게는, "이 아이는 나의 누이동생인 홍 향수(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