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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으로 추억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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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18회 작성일 20-11-12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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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공급 스윗치가 자꾸 차단되어 원인을 점검했더니 주방 인덕션의 소비전류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전까지 가스렌지, 전에는 연탄불을 이용했었는데 이제는 전자렌지, 누룽지까지 알맞게 만들어 주는 전기밥솥과 함께 인간에게 편리성 추구는 한이 없는것 같다
아직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겠지만 . .

그 옛날 시골 우리집은 네모진 초가집 한쪽에 덧대어서 짚으로 엮어 만든 부엌은 추운 겨울을 나기가 힘들었었다
그래도 밥 지으려 불을 땔때면 쭈구려 옆에 앉아 밝게 타는 아궁이의 불꽃을 바라보며 언손을 녹이곤 했었다

볏단이 탈때면 조용하게 '사악사악', 
보릿대가 탈때는 소리가 조금 크게 '사드락 사드락' 
옥수수대가 탈때는 '쉬이 사악 ~ 틱'
장작불은 조용히 타다가 '수우욱 ~ 탁. 탁'
깻대가 탈때는 '후두두둑 후두두두둑'
콩대가 탈때는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그러나 맵재는 소리가 나지않고 바람을 불어넣는 손으로 돌리는 불무소리만 '덜덜덜덜 . . '
타고난 재의 불기가 사라지기 전에 고구마를 묻어놓고 조금 기다리면 따뜻하고 구수한 맛있는 군고구마를 혼자서 즐길 수 있었지

타는 소리와 함께 가마솥에서는 증기가 '휘이 훅 !' 뿜기 시작하고 그야말로 시골 가마솥 하얀 밥이 만들어져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다 먹고나면 구수한 숭늉과 또 아그작 깨물 수 있는 누룽지도 얻어 먹을 수 있었고 . .

아궁이는 대체로 가마솥과 양은솥으로 구성되어 쇠가마에는 식구 7명이 먹을 밥을 짓고 양은솥에는 주로 국을 끓였다
그 불은 밥과 국을 만들었지만 또하나의 임무는 방 구들을 덥히는 일이었다
그 열기로 식구들이 추운겨울을 날 수 있었고 밖에 눈보라가 몰아쳐도 두터운 큰 이불 하나로도 온식구가 따뜻하게 잠들 수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초가지붕 위 연돌에 저녁 연기가 피어 올랐고 그것은 전형적인 시골 모습이며 정겨운 풍경으로 우리가 살아 온 생활의 한 단면이기도 했었지 !

밥을 지을 필요가 없을 땐 그래도 따뜻하게 방을 덥혀야 하기 때문에 군불을 때야 했었고 이때 그냥 솥을 달굴 수 없어 물을 끓이거나 빨래를 삶기도 했다
그러나 새벽녁에는 따뜻하던 방바닥의 열기가 식게되고 이불을 뒤집어 쓴채 몸을 웅크릴뿐 잠결에 일어나기 싫어 그냥 참을 수 밖에 . .

불때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했으며 남자들은 바깥 일을 했었는데 그것은 불을 땔 나무를 구해오는 일이다
우리는 논농사 볏짚이 있어 조금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봉의산까지 가거나 가까운 야산에서 잔디에 있는 솔가루를 갈퀴로 긁어 지게에 지고 오거나 길가의 풀을 베어 말리는 등 탈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부엌 아궁이로 집어 넣었다

그래서 60년대 우리나라 산들은 민둥산이었으며 나중에 조림사업을 했지만 계속 산에서 땔감을 찾았다면 산의 푸르름은 지속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머스마들은 또한 정월 보름이 되면 어떻게 알아 차리는지 꼭 동네 논둑에서 '망우리야 !' 하면서 불놀이를 하는 것 이었다
잘 알고 있듯이 망우리는 작은 통조림 깡통에 구멍을 송송 뚫어 나무를 넣고 불을 피워 돌리는 것으로 캄캄한 밤중에 불들이 원을 만들며 그 불빛에 얼굴이 비치는데 당시 TV 나 라디오가 없었던 시절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었다
통에 나뭇가지와 작은 불씨를 넣고 돌리면 곧 불이 붙고 활활 타오르지만 작은 불씨가 애를 태우며 살아나지 않아 몇번이고 계속 돌려 애를 태우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때 소나무 솔방울이 있다면 몇개 넣고 돌려 쉽게 불씨가 살아 나곤 했었다

망우리하며 모닥불을 피우고 쥐구멍에 연기를 넣어 보기도 하고 논둑에 난 잔디풀을 태우기도 했다
여럿이 불을 쬐고 놀며 조금 더 따뜻해지고 싶어 불옆에 가까이 서있다가 그만 바지 가랭이에 불이 붙은 친구가 별안간 뒹글면서 옷에 옮겨붙은 불을 끄기도 했었다
낮에는 논두렁에 불을 놓는 사람도 있었으며 맑게타는 불꽃은 햇볕에 잘 분간이 안되어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가까운 울타리나 담에 불이 홀라당 옮아붙는 경우도 있었다

부용 경로당옆 높은 위치에 있는 싸이렌이 '앵 ~  ~' 울기 시작하면 대부분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며 어느 쪽에서 연기가 나나 하고 달려 나왔다
시골 수수대 울타리나 초가지붕 등 쉽게 탈 수 있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쉽게 불이 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나 대부분 어렵지 않게 물로 끌 수 있어 그렇게 큰 불은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불이 난 곳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수대로 날라 끄고 있고 소방차 구루마 위에서는 두사람이 양쪽에 서서 펌프의 손잡이를 열심히 누르며 펌핑하고 있었다
지금은 볼 수없는 옛날식 구루마 소방차로 엔진이 없어 불난 장소까지 손으로 끌며 달려 가야했고 물을 분사하기 위해 구루마에 얹혀있는 펌프를 펌핑을 하는 것도 모두 소방대원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었지
수원은 주로 우물을 이용했으며 마르면 다른 우물로 옮기고 늦게 발견하여 불이 커져 있으면 우물물이 부족하여 멀리 논물이나 방죽물에 호스를 대야할 수도 있었다

나도 우리집에 큰불로 될 수 있을뻔한 불을 낸 적이 있다

초교에 들어가기 전에 부엌 아궁이에 어머니가 불을 때고 있을 때 옆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심심하던 나는 때고 있는 보릿대(밀짚모자 만들거나 빨대로도 이용되었던) 하나를 빼어들고 불을 붙혀 손에 들고 뒷쪽에 있는 땔감용 보리다발에 사알짝 옮겨 불을 붙혀 놓고 타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그런데 불은 조금 있다 후루루 금방 번지며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부억 뒷쪽 짚으로 엮은 벽으로 번지며 타 올라갔고 옆에 있던 식구들이 깜짝 놀라 수대로 물을 마구 퍼부어 껐다
그래서 뒷쪽 바람 차단하는 역어 짠 곳 중간 부분에 보름달 보다 더 크게 구멍이 동그랗게 났으며 한동안 나는 검게 그슬린 구멍으로 바깥 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나는 그 일로 혼나지 않았다
철없는 어린 나이에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러 꾸지람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중에 생각 들었다
만약 그 불이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 됐더라면 짚과 나무로 만들어진 부엌과 초가지붕은 몽땅 타버리고 아마 우리 식구는 오갈데 없는 알거지가 되었을 것 임에 틀림이 없다

그시절 부용에는 의용소방대가 있었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수동식 펌프 구루마 소방차는 파출소 건너편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후에 파출소 옆 재영이네 집 옆으로 옮긴것 같다

아궁이 불이나 촛불, 호롱불이 원인이 되는 시골에서의 불이 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변모하여 도시의 대형화와 함께 고층화재, 대형 산불 등 달라진 환경에 맞게 불끄는 방법도 달라진 지금은 전문적인 장비와 시스템으로 화재 진압도 고도화 되었음을 실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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