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통학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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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서부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는 칙칙폭폭 검은 연기를 날리며 여객 차량에 때로는 한쪽은 짐칸이 달린 기차를 타고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이리에 있는 학교로 통학 했다
내가 살던 부용은 호남선에 있는 작은 역이나 직장이나 학교가 이리인 통근자들, 먼 역골에서 까지도 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침 기차시간이면 역 플랫폼에 낯익은 아저씨, 혼자만 좋아하던 예쁜 여학생, 함께 통학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종착역으로 기차는 부용역에 도착할 때 쯤에는 항상 만원이어서 나는 주로 객차 오르는 문 가까운데를 타고 다녔다
차에 타고 있으면 시절에 따라 기찻길 주변에 지나가는 풍경으로 농사 일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기차가 커브를 돌 때면 제일 앞에 달려있는 기차 화통에서 나오는 시커먼 연기도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시골 촌놈이 그동안 멀리서 바라만 보던 기차를 타는 일에 금방 익숙해져서 이제는 겁도 없이 아래에 기차 바퀴가 덜커덩 덜커덩 굉음을 내고 구르는데도 문 손잡이에 매달려 가는 마치 청룡열차를 타고 가는 스릴 같은 재미를 느끼며 때로는 날리는 시커먼 석탄연기 가루가 눈에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 데도 그런 자체를 즐겼다
한편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출발역 이리역에서는 거의 매일 기차가 제시간에 출발하지 못하여 연착, 연발을 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연착이라 불렀다)
특히 추운 겨울 이리역 플랫폼에서그 시절 방한이 제대로 안되는 겨울옷을 입은채 혹한에 덜덜 떨며 꽁꽁 얼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2 ~ 3 시간 동안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일은 우리들에겐 지루하고도 굉장히 힘든 시간들이었고 그런 일들은 그 뒤로 머리 한 구석에 박혀 버렸다
때로는 넓은 이리역 잘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찾아 다니다 올라 타기도 하였으며, 다음에는 서울에서 오는 여수행 열차가 이리역에서 객차 칸을 분리하여 우리 통학열차에 연결하여 가곤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차를 기다리다 지쳐 도착 전역인 서울쪽 황등까지 그쪽 방향으로 가는 통학차를 타고 가서 다시 내려 오는 차를 타고 오기도 했다
하루에 한번 저녁 통학차 출발 시간은 정해져 있어서 학교 끝나는 시간은 때에 따라 달라서 시간이 남으면 기다려야 했고 때로 출발 시간에 촉박할 때는 역을 향해 이리 시내를 헐레벌떡 뛰어 다니기도 했지만 특히 토요일, 일찍 끝나는 날에는 저녁 늦은 기차시간 까지 역 근처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 것도 무료한 일의 하나였다
그래서 토요일에 몇번 친구와 함께 부용까지 7.2 km 약 2시간 거리를 걸어 간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하며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지만 기찻길을 벗어난 일반도로로도 그정도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 것 같으나 어린 우리들에게는 불편한 경험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역 근방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주로 역 대합실이나 옆에 있는 학생회관에서 기다리는데 운 좋으면 2층 책상에 한 자리 잡을 수 있고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한번은 고교때 이리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초만원이어서 객차 안쪽으로 들어 갈 수도 없고, 들어 가면 첫번째 역인 부용에서도 내릴수 없다고 생각되어 문 근처로 타려고 망설였으나 말 그대로 도저히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차를 반드시 타지 않으면 다른 집에 갈 방법이 없다
일단 한손으로 객실 난간 손잡이를 잡고 한 발은 가까스로 제일 아랫계단 끝 부분에 딛은 채 다른 한손에 꽤 무거운 가방을 잡고 굉장히 위험스럽지만 매달렸다
차가 출발하여 덜컹거리며 가는데 발 바로 밑에는 철로, 목천포 다리 등이 쉑쉑 지나 갔지만 손을 놓치면 곧 죽음, 골로 갈 것이니 죽을똥 살똥 난간을 잡은 한손과 가방 잡은 손을 꼭 놓치지 않으려 하며 위험스럽게 매달린 자세는 힘들었고 마치 난코스 서커스 타는 것 만큼 무한한 긴 시간으로 느껴 졌었다
나중에 부용에도 시내버스가 들어와 버스로 통학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편리한 기차를 주로 이용하였다
(통학기차는 하루 한번 뿐이며 버스는 시간 간격이 있고 다음 버스를 기대할 수 있었지만 . .)
아마 중3 이나 고1때 쯤 버스비가 약 15원가량 되었을 때는 일원짜리 동전을 하나가 없어도 만원버스에서 차장이 일일히 다 셀수는 없을 것 같아 슬쩍 1원짜리 하나를 빼먹고 주기도 했다
고교 때 매달 돈을 내고 역에서 새로 발급 받아야 하는 350 원쯤 하는 통학증 값을 아끼느라 한달 동안이나 새로 발급 받지 않고 다닌 적이 있음을 이자리에서 고백한다
이리역에는 네곳 대전선, 전주선, 군산선, 정읍선 통학차들이 매번 비슷한 시간에 들어 와 많은 무리가 한번에 쏟아져 나올 때는 개찰구 역무원도 검표와 통학증 확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일일히 빨간색 글씨로 기록 된 통학증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것이지만 때로는 내가 탄 정읍선 한곳만 도착하면 약간 한가한 때이기에 개찰구 역무원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빠져 나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몇몇 친구들 무용담에 홀리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개찰구에서 역무원에 잡혀서 여객 사무실로 끌려 가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을 했었구나 하고 후회가 되었다
당시 통학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컸고 그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을 때였기도 하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부용역을 포함한 호남선은 고교때쯤 기차는 디젤기관차로 바뀌고 그 뒤로 고속열차가 생겼지만 부용역에 서지 않고 통과하며 자가용이 늘어난 지금은 이용자가 줄어 들고 효용가치가 떨어져 역이 폐쇄된지 오래라고 하니 이제는 기차를 탈 수가 없다
내가 살던 부용은 호남선에 있는 작은 역이나 직장이나 학교가 이리인 통근자들, 먼 역골에서 까지도 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침 기차시간이면 역 플랫폼에 낯익은 아저씨, 혼자만 좋아하던 예쁜 여학생, 함께 통학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종착역으로 기차는 부용역에 도착할 때 쯤에는 항상 만원이어서 나는 주로 객차 오르는 문 가까운데를 타고 다녔다
차에 타고 있으면 시절에 따라 기찻길 주변에 지나가는 풍경으로 농사 일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기차가 커브를 돌 때면 제일 앞에 달려있는 기차 화통에서 나오는 시커먼 연기도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시골 촌놈이 그동안 멀리서 바라만 보던 기차를 타는 일에 금방 익숙해져서 이제는 겁도 없이 아래에 기차 바퀴가 덜커덩 덜커덩 굉음을 내고 구르는데도 문 손잡이에 매달려 가는 마치 청룡열차를 타고 가는 스릴 같은 재미를 느끼며 때로는 날리는 시커먼 석탄연기 가루가 눈에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 데도 그런 자체를 즐겼다
한편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출발역 이리역에서는 거의 매일 기차가 제시간에 출발하지 못하여 연착, 연발을 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연착이라 불렀다)
특히 추운 겨울 이리역 플랫폼에서그 시절 방한이 제대로 안되는 겨울옷을 입은채 혹한에 덜덜 떨며 꽁꽁 얼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2 ~ 3 시간 동안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일은 우리들에겐 지루하고도 굉장히 힘든 시간들이었고 그런 일들은 그 뒤로 머리 한 구석에 박혀 버렸다
때로는 넓은 이리역 잘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찾아 다니다 올라 타기도 하였으며, 다음에는 서울에서 오는 여수행 열차가 이리역에서 객차 칸을 분리하여 우리 통학열차에 연결하여 가곤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차를 기다리다 지쳐 도착 전역인 서울쪽 황등까지 그쪽 방향으로 가는 통학차를 타고 가서 다시 내려 오는 차를 타고 오기도 했다
하루에 한번 저녁 통학차 출발 시간은 정해져 있어서 학교 끝나는 시간은 때에 따라 달라서 시간이 남으면 기다려야 했고 때로 출발 시간에 촉박할 때는 역을 향해 이리 시내를 헐레벌떡 뛰어 다니기도 했지만 특히 토요일, 일찍 끝나는 날에는 저녁 늦은 기차시간 까지 역 근처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 것도 무료한 일의 하나였다
그래서 토요일에 몇번 친구와 함께 부용까지 7.2 km 약 2시간 거리를 걸어 간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하며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지만 기찻길을 벗어난 일반도로로도 그정도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 것 같으나 어린 우리들에게는 불편한 경험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역 근방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주로 역 대합실이나 옆에 있는 학생회관에서 기다리는데 운 좋으면 2층 책상에 한 자리 잡을 수 있고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한번은 고교때 이리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초만원이어서 객차 안쪽으로 들어 갈 수도 없고, 들어 가면 첫번째 역인 부용에서도 내릴수 없다고 생각되어 문 근처로 타려고 망설였으나 말 그대로 도저히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차를 반드시 타지 않으면 다른 집에 갈 방법이 없다
일단 한손으로 객실 난간 손잡이를 잡고 한 발은 가까스로 제일 아랫계단 끝 부분에 딛은 채 다른 한손에 꽤 무거운 가방을 잡고 굉장히 위험스럽지만 매달렸다
차가 출발하여 덜컹거리며 가는데 발 바로 밑에는 철로, 목천포 다리 등이 쉑쉑 지나 갔지만 손을 놓치면 곧 죽음, 골로 갈 것이니 죽을똥 살똥 난간을 잡은 한손과 가방 잡은 손을 꼭 놓치지 않으려 하며 위험스럽게 매달린 자세는 힘들었고 마치 난코스 서커스 타는 것 만큼 무한한 긴 시간으로 느껴 졌었다
나중에 부용에도 시내버스가 들어와 버스로 통학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편리한 기차를 주로 이용하였다
(통학기차는 하루 한번 뿐이며 버스는 시간 간격이 있고 다음 버스를 기대할 수 있었지만 . .)
아마 중3 이나 고1때 쯤 버스비가 약 15원가량 되었을 때는 일원짜리 동전을 하나가 없어도 만원버스에서 차장이 일일히 다 셀수는 없을 것 같아 슬쩍 1원짜리 하나를 빼먹고 주기도 했다
고교 때 매달 돈을 내고 역에서 새로 발급 받아야 하는 350 원쯤 하는 통학증 값을 아끼느라 한달 동안이나 새로 발급 받지 않고 다닌 적이 있음을 이자리에서 고백한다
이리역에는 네곳 대전선, 전주선, 군산선, 정읍선 통학차들이 매번 비슷한 시간에 들어 와 많은 무리가 한번에 쏟아져 나올 때는 개찰구 역무원도 검표와 통학증 확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일일히 빨간색 글씨로 기록 된 통학증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것이지만 때로는 내가 탄 정읍선 한곳만 도착하면 약간 한가한 때이기에 개찰구 역무원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빠져 나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몇몇 친구들 무용담에 홀리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개찰구에서 역무원에 잡혀서 여객 사무실로 끌려 가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을 했었구나 하고 후회가 되었다
당시 통학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컸고 그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을 때였기도 하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부용역을 포함한 호남선은 고교때쯤 기차는 디젤기관차로 바뀌고 그 뒤로 고속열차가 생겼지만 부용역에 서지 않고 통과하며 자가용이 늘어난 지금은 이용자가 줄어 들고 효용가치가 떨어져 역이 폐쇄된지 오래라고 하니 이제는 기차를 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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