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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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관악산의 안양쪽 한 줄기인 비봉산에 가는 길이 질퍽거려 그 질펀거리는 곳을 요리 조리 피하여 발을 딛으며 문득 어릴적 내가 살던 부용의 신작로가 생각이 난다
신작로란 말은 한자말이며 '새로 만든 길'이라는 것 같은데 내가 살던 부용은 역에서 우리가 다닌 국민학교(초등학교) 앞 까지를 그렇게 불렀다
길바닥이 그냥 흙이어서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얼고 녹은 진흙길 신작로에는 장화가 필수품이었다
장화를 신으면 눈비 와서 팟죽 같은 흙탕길도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도 가로질러 넘어갈 수 있고 넓은 신작로에 여기 저기 진흙탕이 있어도 그곳을 바지자락에 흙을 묻히지 않고 갈 수 있다
비싼 장화를 못 신고 보통 검정 신발을 신으면 구루마(우마차) 자국으로 깊이 파인 길은 조심조심, 행여 가지랭이 흙 묻을세라 폴짝 뛰기도 하고 길 가장자리로 돌아 가기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괜찮을 만한 길을 찾아서 조금 먼 골목길로 돌아 가야만 했다
특히 겨울철 눈이 온뒤 얼었다 녹으면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닌 곳은 그래도 다져져서 그 파진 정도가 조금 나았지만 조금 벗어나 중학교나 사거리 등 용지 가는 길은 그 때문에 신발 신고 걸어 가기 조차 힘들었고 우리들은 그런 흑더미 흙탕길을 피하여 가상에 풀이 조금 난곳을 찾아 그런 곳을 간신히 밟으며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런 것은 말 타고 다니는 서부영화의 거리에서 간혹 진창길 광경을 볼수 있는데 옛날엔 다 그랬었다
그러나 맑은 날이 계속 이어지면 땅은 마르고 점차 꼬독꼬독 단단해져 다시 길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다니기 시작한다
우리집 쪽 신작로 입구 소금집 옆에서 전봇대에 묶어진 이후에도 볼수 없던 말과 말구루마를 보았다
그시절 구루마 바퀴는 모두 나무로 된 바퀴였다
나무 바퀴는 튼튼한 나무 여러개를 원형 테두리에 고정하고 가장자리 땅에 닿는 나무 테두리는 오래 견디게 하기 위한 철판을 덧 댇는데 그런 구루마는 자갈길을 지나가면 덜그럭 거리는 바퀴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가끔 얻어 탈 수 있었는데 나무 바퀴가 마른 땅에 닿을 때마다 더그덕 도그덕거리며 진동이 났고 그게 꽤 심하여 앉은 엉덩이가 몹시 불편했다
신작로는 주된 도로로 늘 소 구루마(우마차)가 지나 다니는데 어릴 때 개구장이 우리들은 논에서 실고 온 볏나락 또는 짚다발 등을 잔뜩 실은 구루마에 달려가서 뒷부분에 매달려 올라 타곤 했었다
또 부용역 마라부시(역 보관창고)에서 가끔 큰 트럭이 비료푸대 등을 실고 양로원 옆 올라 가는 오르막길에서 천천히 힘겹게 가고 있을 때도 다른 애들과 함께 뒷부분 매달려 가는 재미도 가끔씩 즐기는 일이었다
TV 나 게임기 등이 전혀 없을 때라 우리 주위에 보이는 일들은 모두가 놀이감 대상이었고 어른들이 못하게 하지만 높은 나무에 올라가면 멀리 볼 수 있고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등 뭔가를 재밌게 보내기 위한 일들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로 된 구루마 바퀴는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고무타이어로 모두 바뀌더니 그런 구루마를 올라타면 이젠 덜그럭 거리지 않았고 약간 흔들거리기는 하지만 상당히 고소하며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더니 타이어 구루마 바퀴로 바뀌면서 신작로 옴팍집 옆에 있던 구루마 수리점도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것 같다
좁게 파이던 길의 나무 바퀴 자국이 타이어 바퀴 만큼 이젠 넓게 파여지고 이제는 그곳에 빗물이 더 많이 고인다
이제는 그 길들이 모두 콘크리트나 시멘트 포장으로 되어 그런 일들은 언제 그랬었는듯이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고 기억 한 구석에만 남아 있을 뿐이나 그런 기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일이 가끔 TV 에 나오곤 하여 철없던 시절을 혼자 슬며시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오래전 옛날 일을 그리는 중국영화에서 임금이나 고관대작과 그들의 사모님들이 구루마 같은 것을 타고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 시대는 타이어 바퀴가 나오기 훨씬 오래 전 이야기니 마차 바퀴는 당연히 우리들 어렸을 때 보아 왔던 그런 나무 바퀴이다
그런 마차의 승차감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 속으로 웃을 수 밖에 . .
물론 편하게 하기 위한 장치를 했으리라 생각 되지만 비포장 도로에서는 그래도 높으신 분의 엉덩이가 더그덕 더그덕 하는 진동 전달은 구조상 어쩔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불편함을 참으며 견디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지위가 있는데 아무래도 아랫사람처럼 걸어 갈 수는 없을테지만 . .
신작로는 부용의 메인 도로이며 우리동창들도 신작로 주위에 많이 살았었다
떡집 경덕, 그 근방 최병훈, 삼거리 석유집 성모, 병원집 재희, 자전거포 호야, 그 옆 삼묵. 철물점 현애, 점방네 연석, 이발소집 명숙, 기름집 재영, 역전 중렬 등이다
어릴적 그 신작로에는 철공소, 병원, 비단집, 한약방, 세탁소, 만화가게 빵집, 석유기름 담배집, 철물점, 약국, 이발소, 떡집, 방앗간, 자전거포, 구루마집, 양조장, 사진관, 늘어선 술집 등이 번창했었는데 어느샌가 하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미 부용중학교는 폐소된지 오래이며 부용국민학교도 썰렁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한번 그 옛날의 신작로를 부용역에서 부터 더듬어 걸어가 볼까 . .
역에서 오다보면 오른쪽에 중렬이 집이 있었는데 안채인지라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아버지가 역에 근무하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으며
그쪽 옆으로 우체국이 있고(그 자리는 원래 빈터이었으며 엤날에 가설 영화극장으로 많이 사용되었었지),
조금 더 오면 양쪽에 점방이 있던 곳에서 부터 길이 좁아졌으며
더 오면 왼쪽에 영단(커다란 정미소와 함께 무얼하는 곳인지 잘 모르겠다)이란 곳에 우리동창 여자애가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전학간것으로 알고 있고
더 올라오면 오른쪽 높은 곳에 경로당이 있었고
그 다음 파출소가 있고 (그자리도 공터일 때 약장시들이 심청전, 장화홍련전등과 함께 창을 공연하던 우리 동네를 좀 시끄럽게 만들던 곳이었었지 !)
그 다음이 재영이네 기름집이 있었고
그옆이 최명숙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가 있어 우리아버지와 내가 머리를 많이 깍았었지, 이발소 이름이 잘 생각이 안나네 !
조금 더 오면 그 옛날에 중국집이 있어 우리 큰 누나가 가끔 시켜먹고 내가 심부름하던게 생각이 난다
조금 더 올라오면 길 모퉁이에 사진관이 있었고 거기서 기차타고 올 때 우리 집으로 꺽어져 내려오는 곳이었었지
조금 더 오면 정미소가 있었고
그 앞쪽에는 양조장이 있어 아버지 심부름으로 대도병을 가지고 막걸리 심부름을 많이도 다녔었지
더 올라오면 오른쪽에 옴팍집(주점)이 있었으며
그 앞집에는 고깃집이 있어 이따금 돼지고기를 사서 국끌여먹던 기억이 난다
그쪽으로 조금 더 오면 점방이 있고
그앞에 오래전 과일가게가 있었으며
그집 옆 수룡구지로 가는 길 모퉁이에 약국이 있었지(나중에 자리를 옮겼지만..)
그쪽 왼쪽 수룡구지로 가는 길 건너편에 연석이 엄마가 하던 가계가 있었으며(연석어머니의 항상 수심에 차있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
신작로 오른쪽에는 우리가 애용하던 정미소가 있었고
그 옆에 생선가게가 있어 가끔 꽁치, 고등어를 사다 먹었었는데 꽁치국 맛이 참 맛이 있었지
그 이웃 코너에 주점이 있었으며 신작로에서 우리집으로 오는 골목길로서 국민학교로 가는 길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다니던 길목이다
길 반대편에 1년선배 창희네 점방이 있었고
바로 옆에 나중에 생겼지만 만화가게와 앙꼬빵 장사(우리 옆집 낙희형이 운영)가 있었으며
그 옆집에 시계포가 있었고 나중에 쌀집이 되었지만 . .
우리집으로 오는 길목에는 앞에 말한 주점과 그 건너편 그러니까 신작로 오른 쪽 코네에는 경성고무신 가게가 있었으며
같은 집에 석유/기름/소금집이 있어 우리집의 어둔 밤을 밝게하는 등잔에 넣을 기름과 나중에 석유곤로용 기름을 내가 부지런히 조달하던 곳이었단다
그 옆에는 오래전에 문을 닫은 비단집이 있었으며
길 건너편(왼쪽)에는 무슨 한약방이었었는데 나중에 슬그머니 없어졌었다
그 근방이 삼거리로 말하자면 신작로 중심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즉 반월리, 과수원으로 가는 길과 학교로 가는 갈라지는 길이었고
양 길목의 중심에 철물점(현애아버지가 운영)이 있었고 그쪽에 미장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작로 학교가는 방향의 오른쪽에 세탁소가 있었는데 자리를 옮긴 것으로 기억이 희미하며
왼쪽에 세탁소와 자전거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삼묵이네 집이 있었지
건너편에는 성결교회가 있었고 거기서 종화네 집으로 가는 갈라지는 길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길이 폐쇄 되어 버렸다
조금 더 오면 호야네 자전거포가 있었고 우리들이 가끔 자전거 바람을 넣고 고치기도 했었지
길 건너편에는 병원(재희네)이 길가에 있었다 (나중에 건물을 지어 안쪽으로 들어 갔지만)
성모네집은 그옆 안집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금 더 오면 그쪽 신작로 왼쪽방향으로 정미소(귀자네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곳)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도 정미소가 서로 경쟁을 했었지
조금 더 오면 중학교 가는 갈라지는 길이 나오고
오른쪽에는 부용교회로 접어드는 길목에 점방이 있었고
건너편에 이발소가 있었지
오른쪽으로 더 오면 점방(지금도 있는 것 같더만)이 있고
그 앞집에 엤날에 불무를 피우던 대장장이집이 있었는데 이것을 아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 것이리라 생각한다
학교앞에는 학교에 다니던 길목으로 정덕이네 떡집이 있었으며
학교앞 코너에 소사를 하던 아저씨네 가게가 있었고
즉 학교며 삼거리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으며 길 건너편에도 가계가 있다 없어졌었지
아 ! 그립다 . .
예쁘장한 비단장수 아주머니, 좀 무뚝뚝하게 보이던 한약방 할아버지, 그리 친절하게 보이지 않던 연석 어머니, 철물점 아저씨, 열심히 일하던 호야네 아버지, 세탁소 아저씨, 내가 잘 다니던 이발소 아저씨(명숙아빠) 웃음. . .
지금은 아스팔트로 되었지만 비가오면 질턱발탁하게 깊게 파이던 진흙탕밭 길은 오래전 옛 추억으로 되어 버렸지만 내가 어릴 떄 그때가 부용의 피크였었던 것 같다
신작로란 말은 한자말이며 '새로 만든 길'이라는 것 같은데 내가 살던 부용은 역에서 우리가 다닌 국민학교(초등학교) 앞 까지를 그렇게 불렀다
길바닥이 그냥 흙이어서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얼고 녹은 진흙길 신작로에는 장화가 필수품이었다
장화를 신으면 눈비 와서 팟죽 같은 흙탕길도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도 가로질러 넘어갈 수 있고 넓은 신작로에 여기 저기 진흙탕이 있어도 그곳을 바지자락에 흙을 묻히지 않고 갈 수 있다
비싼 장화를 못 신고 보통 검정 신발을 신으면 구루마(우마차) 자국으로 깊이 파인 길은 조심조심, 행여 가지랭이 흙 묻을세라 폴짝 뛰기도 하고 길 가장자리로 돌아 가기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괜찮을 만한 길을 찾아서 조금 먼 골목길로 돌아 가야만 했다
특히 겨울철 눈이 온뒤 얼었다 녹으면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닌 곳은 그래도 다져져서 그 파진 정도가 조금 나았지만 조금 벗어나 중학교나 사거리 등 용지 가는 길은 그 때문에 신발 신고 걸어 가기 조차 힘들었고 우리들은 그런 흑더미 흙탕길을 피하여 가상에 풀이 조금 난곳을 찾아 그런 곳을 간신히 밟으며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런 것은 말 타고 다니는 서부영화의 거리에서 간혹 진창길 광경을 볼수 있는데 옛날엔 다 그랬었다
그러나 맑은 날이 계속 이어지면 땅은 마르고 점차 꼬독꼬독 단단해져 다시 길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다니기 시작한다
우리집 쪽 신작로 입구 소금집 옆에서 전봇대에 묶어진 이후에도 볼수 없던 말과 말구루마를 보았다
그시절 구루마 바퀴는 모두 나무로 된 바퀴였다
나무 바퀴는 튼튼한 나무 여러개를 원형 테두리에 고정하고 가장자리 땅에 닿는 나무 테두리는 오래 견디게 하기 위한 철판을 덧 댇는데 그런 구루마는 자갈길을 지나가면 덜그럭 거리는 바퀴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가끔 얻어 탈 수 있었는데 나무 바퀴가 마른 땅에 닿을 때마다 더그덕 도그덕거리며 진동이 났고 그게 꽤 심하여 앉은 엉덩이가 몹시 불편했다
신작로는 주된 도로로 늘 소 구루마(우마차)가 지나 다니는데 어릴 때 개구장이 우리들은 논에서 실고 온 볏나락 또는 짚다발 등을 잔뜩 실은 구루마에 달려가서 뒷부분에 매달려 올라 타곤 했었다
또 부용역 마라부시(역 보관창고)에서 가끔 큰 트럭이 비료푸대 등을 실고 양로원 옆 올라 가는 오르막길에서 천천히 힘겹게 가고 있을 때도 다른 애들과 함께 뒷부분 매달려 가는 재미도 가끔씩 즐기는 일이었다
TV 나 게임기 등이 전혀 없을 때라 우리 주위에 보이는 일들은 모두가 놀이감 대상이었고 어른들이 못하게 하지만 높은 나무에 올라가면 멀리 볼 수 있고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등 뭔가를 재밌게 보내기 위한 일들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로 된 구루마 바퀴는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고무타이어로 모두 바뀌더니 그런 구루마를 올라타면 이젠 덜그럭 거리지 않았고 약간 흔들거리기는 하지만 상당히 고소하며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더니 타이어 구루마 바퀴로 바뀌면서 신작로 옴팍집 옆에 있던 구루마 수리점도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것 같다
좁게 파이던 길의 나무 바퀴 자국이 타이어 바퀴 만큼 이젠 넓게 파여지고 이제는 그곳에 빗물이 더 많이 고인다
이제는 그 길들이 모두 콘크리트나 시멘트 포장으로 되어 그런 일들은 언제 그랬었는듯이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고 기억 한 구석에만 남아 있을 뿐이나 그런 기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일이 가끔 TV 에 나오곤 하여 철없던 시절을 혼자 슬며시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오래전 옛날 일을 그리는 중국영화에서 임금이나 고관대작과 그들의 사모님들이 구루마 같은 것을 타고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 시대는 타이어 바퀴가 나오기 훨씬 오래 전 이야기니 마차 바퀴는 당연히 우리들 어렸을 때 보아 왔던 그런 나무 바퀴이다
그런 마차의 승차감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 속으로 웃을 수 밖에 . .
물론 편하게 하기 위한 장치를 했으리라 생각 되지만 비포장 도로에서는 그래도 높으신 분의 엉덩이가 더그덕 더그덕 하는 진동 전달은 구조상 어쩔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불편함을 참으며 견디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지위가 있는데 아무래도 아랫사람처럼 걸어 갈 수는 없을테지만 . .
신작로는 부용의 메인 도로이며 우리동창들도 신작로 주위에 많이 살았었다
떡집 경덕, 그 근방 최병훈, 삼거리 석유집 성모, 병원집 재희, 자전거포 호야, 그 옆 삼묵. 철물점 현애, 점방네 연석, 이발소집 명숙, 기름집 재영, 역전 중렬 등이다
어릴적 그 신작로에는 철공소, 병원, 비단집, 한약방, 세탁소, 만화가게 빵집, 석유기름 담배집, 철물점, 약국, 이발소, 떡집, 방앗간, 자전거포, 구루마집, 양조장, 사진관, 늘어선 술집 등이 번창했었는데 어느샌가 하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미 부용중학교는 폐소된지 오래이며 부용국민학교도 썰렁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한번 그 옛날의 신작로를 부용역에서 부터 더듬어 걸어가 볼까 . .
역에서 오다보면 오른쪽에 중렬이 집이 있었는데 안채인지라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아버지가 역에 근무하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으며
그쪽 옆으로 우체국이 있고(그 자리는 원래 빈터이었으며 엤날에 가설 영화극장으로 많이 사용되었었지),
조금 더 오면 양쪽에 점방이 있던 곳에서 부터 길이 좁아졌으며
더 오면 왼쪽에 영단(커다란 정미소와 함께 무얼하는 곳인지 잘 모르겠다)이란 곳에 우리동창 여자애가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전학간것으로 알고 있고
더 올라오면 오른쪽 높은 곳에 경로당이 있었고
그 다음 파출소가 있고 (그자리도 공터일 때 약장시들이 심청전, 장화홍련전등과 함께 창을 공연하던 우리 동네를 좀 시끄럽게 만들던 곳이었었지 !)
그 다음이 재영이네 기름집이 있었고
그옆이 최명숙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가 있어 우리아버지와 내가 머리를 많이 깍았었지, 이발소 이름이 잘 생각이 안나네 !
조금 더 오면 그 옛날에 중국집이 있어 우리 큰 누나가 가끔 시켜먹고 내가 심부름하던게 생각이 난다
조금 더 올라오면 길 모퉁이에 사진관이 있었고 거기서 기차타고 올 때 우리 집으로 꺽어져 내려오는 곳이었었지
조금 더 오면 정미소가 있었고
그 앞쪽에는 양조장이 있어 아버지 심부름으로 대도병을 가지고 막걸리 심부름을 많이도 다녔었지
더 올라오면 오른쪽에 옴팍집(주점)이 있었으며
그 앞집에는 고깃집이 있어 이따금 돼지고기를 사서 국끌여먹던 기억이 난다
그쪽으로 조금 더 오면 점방이 있고
그앞에 오래전 과일가게가 있었으며
그집 옆 수룡구지로 가는 길 모퉁이에 약국이 있었지(나중에 자리를 옮겼지만..)
그쪽 왼쪽 수룡구지로 가는 길 건너편에 연석이 엄마가 하던 가계가 있었으며(연석어머니의 항상 수심에 차있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
신작로 오른쪽에는 우리가 애용하던 정미소가 있었고
그 옆에 생선가게가 있어 가끔 꽁치, 고등어를 사다 먹었었는데 꽁치국 맛이 참 맛이 있었지
그 이웃 코너에 주점이 있었으며 신작로에서 우리집으로 오는 골목길로서 국민학교로 가는 길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다니던 길목이다
길 반대편에 1년선배 창희네 점방이 있었고
바로 옆에 나중에 생겼지만 만화가게와 앙꼬빵 장사(우리 옆집 낙희형이 운영)가 있었으며
그 옆집에 시계포가 있었고 나중에 쌀집이 되었지만 . .
우리집으로 오는 길목에는 앞에 말한 주점과 그 건너편 그러니까 신작로 오른 쪽 코네에는 경성고무신 가게가 있었으며
같은 집에 석유/기름/소금집이 있어 우리집의 어둔 밤을 밝게하는 등잔에 넣을 기름과 나중에 석유곤로용 기름을 내가 부지런히 조달하던 곳이었단다
그 옆에는 오래전에 문을 닫은 비단집이 있었으며
길 건너편(왼쪽)에는 무슨 한약방이었었는데 나중에 슬그머니 없어졌었다
그 근방이 삼거리로 말하자면 신작로 중심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즉 반월리, 과수원으로 가는 길과 학교로 가는 갈라지는 길이었고
양 길목의 중심에 철물점(현애아버지가 운영)이 있었고 그쪽에 미장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작로 학교가는 방향의 오른쪽에 세탁소가 있었는데 자리를 옮긴 것으로 기억이 희미하며
왼쪽에 세탁소와 자전거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삼묵이네 집이 있었지
건너편에는 성결교회가 있었고 거기서 종화네 집으로 가는 갈라지는 길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길이 폐쇄 되어 버렸다
조금 더 오면 호야네 자전거포가 있었고 우리들이 가끔 자전거 바람을 넣고 고치기도 했었지
길 건너편에는 병원(재희네)이 길가에 있었다 (나중에 건물을 지어 안쪽으로 들어 갔지만)
성모네집은 그옆 안집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금 더 오면 그쪽 신작로 왼쪽방향으로 정미소(귀자네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곳)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도 정미소가 서로 경쟁을 했었지
조금 더 오면 중학교 가는 갈라지는 길이 나오고
오른쪽에는 부용교회로 접어드는 길목에 점방이 있었고
건너편에 이발소가 있었지
오른쪽으로 더 오면 점방(지금도 있는 것 같더만)이 있고
그 앞집에 엤날에 불무를 피우던 대장장이집이 있었는데 이것을 아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 것이리라 생각한다
학교앞에는 학교에 다니던 길목으로 정덕이네 떡집이 있었으며
학교앞 코너에 소사를 하던 아저씨네 가게가 있었고
즉 학교며 삼거리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으며 길 건너편에도 가계가 있다 없어졌었지
아 ! 그립다 . .
예쁘장한 비단장수 아주머니, 좀 무뚝뚝하게 보이던 한약방 할아버지, 그리 친절하게 보이지 않던 연석 어머니, 철물점 아저씨, 열심히 일하던 호야네 아버지, 세탁소 아저씨, 내가 잘 다니던 이발소 아저씨(명숙아빠) 웃음. . .
지금은 아스팔트로 되었지만 비가오면 질턱발탁하게 깊게 파이던 진흙탕밭 길은 오래전 옛 추억으로 되어 버렸지만 내가 어릴 떄 그때가 부용의 피크였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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