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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겨울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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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웃음
댓글 0건 조회 1,492회 작성일 22-12-2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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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겨울 추위
푸르던 산,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눈보라와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 겨울바람 때문에 흐르던 시냇물도 얼어 붙으면 옛 고향 마을도 꽝꽝 언 방죽 위를 커다란 소가 걸어 다녔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겨울 한파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새벽이 되어 방바닥은 차거워 지고 바깥에 바람 한질라 쌩쌩 불면 문풍지가 파르르 떠는 소리를 들으면서 몸으로 덥혀진 이불과 요에서 나오기가 싫었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가야 했다
간신히 이불 속에서 나와 방문을 열고 얼음장 같은 마루 바닥을 밟고 지나 찬바람이 살을 에려고 하는데도 세수는 해야 했다

간밤에 부엌 수댓물이 꽁꽁 얼었으면 우물 물을 새로 퍼다가 양은 솥에 지푸락 불을 때고 물을 데워 누나가 토방의 대야에 부어주면 다람쥐 세수하는 양 얼굴에 몇번 물을 뭍혔다 

아침을 먹은 뒤 두꺼운 내복을 하나 더 쪄입고 양말도 두겹으로 신고 책을 챙겨 책보에 싸는데 6학년이라 책이 많아져 전에는 책을 그냥 차례로 쌓았지만 이제는 책을 두열로 넙적하게 포개서 쌓았다
장갑 낀 손으로 책보를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은 개침에 넣고 가는 동안 책이 꽤 무거워 책보 드는 손을 교대하며 갔다
더 어렸을 땐 책이 적어 책보를 허리 뒤춤에 매고 다녔었는데 . .

껴입은 옷에 몸이 둔하고 두꺼운 양말로 뒤뚱 뒤뚱 걸음이 쉽지 않았지만 길 가운데 고여 물이 반반하게 얼은 곳이 나오면 검정 고무신 신발로 쭈르르 -  미끄럼을 탔고 또 눈이 굳어 미끄러운 길에서도 미끄럼을 즐겼다

냉냉한 학교 교실에는 난로가 있었으나 조개탄을 넣어 본적 없고 공부시간 내내 추웠고 차거운 나무 마루 바닥으로 발이 시려워 동동 거리면서도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땡땡'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친구들은 쪼르르 교실에서 나와 유리창 옆 햇볕 비치는 남쪽 벽에 기대고 다들 햇볕을 쪼이며 나란히 서 있었는데 나도 사이에 끼어 들어 따뜻한 햇빛을 쬐었다
사실 햇빛 받는 부분만 조금 따스할 뿐 옷이 따뜻하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살랑 불어 오면 몸은 곧바로 움츠려 들 수 밖에 없고 그런 추위에 따뜻함을 조금 느꼈던 햇볕은 우리에게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쌓여있는 눈으로 친구들과 눈싸움을 했다
대부분 장갑과 귀마개가 없던 시절이지만 나는 털 장갑을 끼고 눈싸움하며 재미있어 씩씩 거리며 눈덩이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마구 던졌다
한참 뒤, 누나가 짜준 털실 장갑으로 녹은 눈물이 스며들고 차디찬 냉기에 손가락이 뼛속까지 시려워 장갑을 벗어 버렸다

그때 대부분 털 계사쓰(스웨터)를 선호했었으나 털실로 짠 스웨터는 올이 조밀하지 못해 내복 위에 스웨터만 입으면 바람이 쑥쑥 들어 왔었는데 그래도 그게 따뜻하다고 많이들 입었었다
나름 형편이 좋은 애들은 털이 부월부월하고 화려한 무늬의 스웨터를 자랑하듯 겉에 입었지만 나는 그런 스웨터를 입기 힘들었으나 그래도 누나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짜 주는 계사쓰를 입을수 있었다

계실로 양말, 장갑, 빵모자, 조끼, 계샤쓰, 겉에 입는 코트까지도 여자들이 손으로 쩔어서 신고, 끼고, 쓰고, 입고 다니며 추위를 이겼다
신작로에는 털실을 팔고, 스웨터를 짜는 가게가 있었는데 어느때 쯤인가 슬그머니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른 남자애들처럼 모자가 있고 단추가 여러개 달렸으며 안에 스폰지가 들어 있는 파란 옷을 나도 겉옷으로 입었다
즐겨 입다가 안감 실이 조금 타지면 스폰지가 만져졌고 그 스폰지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다가 심심하면 조금씩 뜯어 내곤 했는데 나중에는 껍데기와 안감만 남고 찬 바깥 냉기가 그대로 전달 되었지만 초등학교 때는 계속 겉옷으로 입었다

겨울에는 차디찬 물로 빨래나 목욕하기가 어려워서 옷을 오랫동안 입었고 추우면 내복이나 겉옷도 한겹씩 더 껴 입었다
옷을 두껍게 오래 입고서 목욕을 하지 않으면 몸이 가려워지고 나도 모르게 몸을 긁었으며, 내복을 벗어 손에 들고 불에 잘 비춰 보면 재봉할 때 겹으로 꿰멘 자리에 이가 살짝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껴 입었던 모두 옷을 홀딱 벗고 등잔불 아래나 햇볕에 비춰서 꼭꼭 숨어있는 놈을 찾아 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꼼꼼하게 다 뒤져서 찾아냈으며, 잡으면 양 손톱 사이에 넣고 꾹 누르면 툭 튀면서 그동안에 가져갔던 내 피가 손톱 위에 빨갛게 물들었다 ㅎㅎ
요리저리 숨어있는 놈을 뒤져서 찾는 재미(?)도 심심한 한때의 일이었지만 사그리 잡고 나면 개운하고 가려운 것이 훨씬 덜했었으니까 . .
여럿이 한 이불에서 잘 때 옆에서 또는 친구들과 놀다 몸싸움 할 때 이가 옮겨 지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벼룩은 높이뛰기 선수로 비록 덩치가 깨알 만한 녀석이 20cm 이상으로 튀어 오르며 방바닥으로 튀어 도망가면 조심스레 보고 있다가 재빠르게 잡지 않으면 안되고, 방 구석진 곳 장판 갈라진 틈바귀를 살짝 들추면 우르르 떼지어 나오는 납작하고 거므스레한 빈대도 마구 두드려 잡고 호마키를 잔뜩 뿌려서 퇴치했다

옷 뿐만 아니라 여자들은 긴머리 속에 아주 작은 서캐가 있어 농 빼닫이에 항상 놓아 두는 옹글한 빗인 대나무 참빗으로 빗었었다
추운 겨울에 머리를 자주 감을 수 없었고 또 샴푸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었으니까 . .

그때 쯤 시골 살며 이를 안 잡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나만 그랬나 ?
초가집에는 목욕탕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라 부엌이나 뒤안에서 남이 보지않는 곳에서 했었으니까 . .

나는 방 한쪽에 큰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누나가 씻겨 줬었다
그 즈음에 옆 작은 부대라 불리는 부락 우물가에 공동 목욕탕을 만들어 놓아서, 그곳에 가서 식구들 모두 교대로 따뜻한 목욕을 실컷 한 적이 있었는데 목욕탕은 작은 창고같은 집이었고 위로 뚜껑없는 길다란 가마솥에 바깥 아궁이에서 밑에 불을 땠으며 많이 소용되는 목욕물은 옆에 있는 깊은 우물에서 계속 손으로 퍼 올려 조달해야 했다

겨울에 찬바람을 많이 쐬면 손등이 트고 얼굴 볼태기 마저 꺼칠꺼칠 해지는데 기차 통학하느라 차창에서 찬바람 쏘여 손 등이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갈라진 틈으로 피가 났다
그러면 동그란 하얀 바탕에 간호원 그림이 있는 안티푸라민을 손등에 바르곤 했었다
오지 않는 기차를 무작정 기다리며 겨울에 추워 손, 귀가 시려 오들오들 떨었고 얇은 검정 운동화를 신고서 발이 시려 동동 구르던 일이 뇌리에 아직 남아 있으며 그때 발을 계속 움직이지 않고 참는 바람에 발가락이 얼어 동상이 걸렸었다는 친구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초가집은 원래 방문의 문종이가 바깥 찬 공기 유입을 막으며 햇볕이 들어오는 유일한 창구이나 창호지는 잘 찢어지는 종이 재질이라 문 여닫으며 들랑거리다가 쉽게 구멍이 났고, 겨울 되기 전에 뚫어진 구멍을 땜방으로 다시 바르거나 급하면 걸레로 쑤셔서 막고 임시로 찬 송곳 바람이 방으로 못들어 오게 하였다

눈보라 몰아쳐서 산과 들, 지붕, 마당에 온통 눈이 쌓이고 문풍지가 부르르 떨면 밤 마실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불을 덥고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일지감치 잠을 잤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캄캄한 밤에 잠이 덜깬 상태에서 춥고 차디 찬 마루를 밟고 눈 쌓인 마당을 건너야 하는 칫깐에 가기가 싫어 마루 또는 웃묵에 놓인 오강에서 해결하곤 했다
60년대 그때에는 다들 그랬을 것이다

우리 집은 부엌의 세개 아궁이에 대부분 대부분 농사지은 지푸락으로 불을 땠으나 가마니 짜고 새끼 꼬느라 지푸락이 부족 해지면 맵재를 사다가, 깻대, 콩대, 그리고 탱자나무 윗부분을 잘라서, 때로는 장작을 구해서, 아궁이에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여야 했는데, 동네에는 가까운 봉의산에 가서 솔가리를 긁어 나무를 한짐 지게에 지고 오는 나뭇꾼이 있었고 그것으로 밥을 짓고 추운 겨울을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추운 날엔 그냥 물을 데우던지라도 해서 필요 이상 아궁이에 불을 많이 때면 방바닥에 손바닥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고 그 위에 요대기를 깔으면 따땃하니 밤에 잘만 하였다
목화 솜을 넣은 이불은 지금보다 훨씬 무거웠지만 그래도 따뜻했고, 아궁이에 불을 많이 때고 솜 이불만 덮으면 바깥 세상이 온통 꽁꽁 얼어 붙는다 해도 자고 생활하는데 전혀 문제 없었다

이런 것들은 그 옛날 겨울 추위에 견디어 낸 우리들의 생활이었지만, 시대는 변하고 이제는 난방 구조도 달라져 따뜻한 방바닥보다 방 공기 온도조절기를 조정하고, 외출할 때는 오리털 패딩에 에스키모 같은 모자 등으로 감싸서 어떠한 동장군이 찾아 와도 끄떡하지 않는 세상으로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각에 추위에 고생하는 사람이 몇 백만, 몇천만이 있으며, 또 계속 생기고 있다 하니 문득 어릴 때 그런 추위에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전쟁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로 북위 49° 에 블리디보스톡과 같은 위도이며 전 국민의 64%가 구 소련식 열병합 발전의 열공급에 의존하고 있어, 대부분 아파트 등 집합 건물은 그런 장치로 부터 열 공급을 받고 있었으나 지금은 러시아의 인프라 시설 공격에 의하여 파괴되고 정전되며 혹한에 떨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곳은 겨울이 10 ~ 4 월로 긴 지역이어서, 폭격에 의해 부서진 유리창을 판자로 임시로 막으며 혹한 추위를 모닥불 등을 피우면서 영하의 날씨를 참고 있을 것이며, 그들도 오리털 파카 옷 등으로 의복은 비록 옛날보다는 나아 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제나 저제나 일상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으로 버티고 기다리며 추위에 떨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옛날같이 지푸락이나 나무를 때서 난방할 수 있는 온돌 구조는 아니어서 비교적 따뜻하게 잠자고 생활하던 우리 어린 시절과는 비교는 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되며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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