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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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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웃음
댓글 0건 조회 1,831회 작성일 22-06-0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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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담집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이 모여 놀던 운동장에 집을 짓고 있었다
동네 가운데의 밭인데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넓은 운동장이 되었고 자치기, 땅따먹기, 술레잡기, 고무줄놀이하며 놀던 곳이 없어지니 무척 슬펐지만 어쩔 수가 없다
 
우리집 입구 앞 땅바닥에 돌로 기초하고 양쪽에 판대기를 대어놓고 괴어놓은 후 안에 흙을 집어넣고 들어가 밟기도 하며 어른들이 도곳대로, 떡매로 콩콩 찌어 다지고 있었다
학교에 갔다 오니 한칸 더 위로 올라 갔는데 다져지면 얼마 있다가 양쪽 판대기를 해체하여 그 위로 올린 후 다시 흙을 넣고 올라가서 밟고 떡매로 치는 것이었다
맨흙을 두드리고 다져서 담을 쌓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샌가 담이 길어지더니 사각 모양으로 둘러 쳐지고 담벽 사이사이에 나무로 네모지게 만든 부엌과 방문 모양의 틀을 세워 놓는다
담벽 열이 다 올라가니 이제 흙담 윗 부분에 대들보와 섯가래를 올려서 초가 지붕을 이엉하고 곧 집 모양이 완성되었다
집 앞쪽에 마루도 만들었고 길쪽의 담도 똑같은 방식으로 쌓아 마당을 넓게 만드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았다

처음에는 뭐하나 하고 궁금해 하면서 그냥 지나 다니다가 그게 점점 집으로 완성이 되어가니 혼자서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섯가래 등 지붕구조를 담위에 설치하여 오로지 담 자체 힘으로 무게를 지탱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항상 밟고 다니는 땅, 그 위에서 흙장난을 하며 손바닥 위에서 부슬부슬하는 흙을 파다가 집을 지었으니 어린 마음에 걱정이 안될수 있나 . .

담벽은 힘이 없어 지붕의 대들보, 섯가래, 처마 등의 무게를 얼마나 오래 지탱하며 견딜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벽에 충격이라도 가해지면 부숴지고 빗물에 젖으면 물러질텐데 하고 . .

그 집은 옆동네 초교동창 이화혁의 오빠가 결혼하고 제금나면서 신혼살림 집으로 지었고 나중에 아들딸 낳아 한참 어린 후배가 생겼다
우리집 입구 앞이라 집이 다 된 후 자주 놀러 다녔다
마당에서 놀다 호기심에 일부러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장판과 벽지가 밝은 색으로 단정하고 참 멋있었으며 우리집보다 훨씬 넓고 근사했다

그런 것은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았고 날이 감에 따라 저절로 잊혀져 버렸다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니 우리 아랫집도 그렇게 만든 담집이었고 군자할머니네, 선택이, 오봉이형네 등 그렇게 만든 흙담집은 우리동네와 이웃동네에 여러군데 있었다

그런 흙담집은 대체적으로 지붕이 낮았고 처마가 조금 더 길었으며 바깥 벽이 기초와 수직이 아니고 비스듬하였다
일부는 마루가 없고 방문앞에 디딤돌이 놓여져 있었으며 그 앞에 공간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거나 볏단 등을 쌓아 놓을 수 있는 마당보다 약간 높은 토방이 있었다
방문 앞 토방이 넓은 집은 토방 중간에, 마루있는 데는 마루 중간에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있어 기둥집과 혼동할 수 있을 것이다

남향이지만 처마가 길고 햇볕이 들어오는 방문 앞쪽이 일부 가림막이 있는 집은 낮에도 담집 방안에 들어가면 조금 어두웠는데 뒷 창문 크기가 작은 편이고 북쪽이라 빛을 들이지 못하여 그런 것 같았다
그당시 초가집들은 대부분 낮에는 방문의 창호지를 통하여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 했었으니까 . .

뒷창문은 대체적으로 크기가 작았으며 담 두께만큼 창턱이 길어 창문이 안쪽에 쑥 들어가 있거나 그만큼 밖으로 나와 있었으며, 창턱 모서리가 모나지 않고 타원처럼 둥글고 매끄럽게 생긴것을 보면 담집임을 알 수 있었다
몸이 작았던 우리들은 넓지 않은 창턱에서 몸을 오므리고 들어가 놀기도 했었으니까 . .
 
담을 쌓을 때 아무 흙이나 넣지 않고 황토흙을 넣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그런 흙담은 굉장히 단단하여 세월을 이겨낸다고 한다
일반 기둥이 있는 집들은 벽을 모두  흙으로 발랐고, 초가나 기와를 얹는 부위에도,  부뚜막에도, 방안에서 아이들이 뛸 수도 있으며 어른의 중량과 쌀가마니 무게에도 견딜수 있는 방바닥도, 구들장 아래의 온돌 고래도 모두 흙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일부는 지푸락을 조금 섞어 만든 흙벽돌로 집을 지었다

또한 흙담은 위에 용머리 지붕으로 박이나 호박덩쿨을 올려 키우기도 하지만 별안간 비가 올때는 놀다가 비를 피하려 담밑의 좁은 처마밑에 움츠리기도 했었다
어릴때 흙담은 탱자나무와 함께 동네 울타리의 일정 부분을 담당했다

흙담은 아랫부분 보다 윗부위을 더 얇게 하여 무게를 지탱하기 쉽게 했으며 중간에 약간 턱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중간 턱부근에 동그란 구멍이 띄엄띄엄 나 있는 것을 볼수 있었는데 만들때 두개의 나무 판자 사이에 양쪽으로 물러나지 않도록 고정시킨 둥근 막대기 흔적으로 대부분 메우고 조금씩 남아 있는 것이다

토담집, 흙담집은 똑같은 말로 옛날 초가집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다
그시절 이전에 지어진 많은 일반 집같이 나무로 기둥을 하고 그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는 구조에 벽속에는 대나무, 수수깡, 지푸락 등으로 고정하고 겉에 진흙을 바른 집을 흙집이라고도 부르며 토담집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흙담(토담)으로 울타리를 한 집을 토담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부르는 것은 자유이나 흙담으로 지은 집과 혼동하게 한다

길가의 흙담은 지금도 지나 가면서 볼수 있는데 바짝 마른 시루떡이 층층으로 쌓여있는 오래된 무늬을 보면 세월의 흐름과 함께 금방 알아볼 수 있으며, 담집은 안에 있어 들어 가봐야 집의 구조나 창문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이 약하여 오래 못갈 것이라는 기우는 잘못된 생각임에 틀림 없는 것은 초등학교때 지은 집이 그뒤로도 객지 생활하다가 고향에 갈때마다 집 입구에, 그리고 동네에 오래전에 지은 집들도 딱 버티고 있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어딘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오랫동안 떠나 사는 동안 고향의 집들도 개축하고 보수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 그러한 흙담집이 다 없어졌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시골 동네의 흙담집을 찾아 보려고 한다
이후 급격하게 생활이 변화되는 와중에 흙담집이 사라졌다고 해도 길가의 흙담들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

동네에 많았던 흙담집은 어린시절 우리 친구들의 소중한 집으로써 또한 놀던 장소로써 그 기억들이 아직 뇌리에 생생하다
조상에 이어 어른들과 우리들이 살았던 전통 가옥들이 콘크리트 구조로 급격히 변화되는 세상에서 일부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면서 그냥 슬그머니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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