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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으로 추억여행

부용 신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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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웃음
댓글 0건 조회 1,410회 작성일 23-03-0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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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라는 단어는 한자말이고 새로 만든 길로서 부용에만 있는게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부용 신작로는 다른 어떤 곳에 없는, 거기 살았던 우리들의 추억이 어려있는 생활 터전이었으며 비록 그 모습은 사라지고 퇴색하였지만 그때를 그리워 하며 뇌리에 남아있는 기억들을 끄집어 내 보려고 한다

일제 강점기, 호남선 철로를 깔고 이리와 김제 사이에 부용 들녁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부용역을 설치하고 역에서 부터 신작로 길을 새로 만든 것 같다

그 신작로는 역에서 부용국민학교까지 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어렸을 때 그 거리에서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고 왕래하며 생활하며 지역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그때가 부용이 가장 번창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

신작로에서 조금 골목으로 들어가는 우리 동네를 장터라 불렀는데 그곳에는 새로 교회도 짓고, 이웃집 두 곳이나 지었으며 결혼하여 식구들이 더 늘어 났기 때문이다
장터라는 이름은 더 옛날 그곳에 시골장이 섰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동네 한바퀴 돌면 그런 흔적이 엿보이고, 그래선지 장터에 산다고 하면 나이 드신 어른들은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그것은 더 오래전 흘러간 이야기인데 반하여 신작로는 내가 어렸을 때가 한창 때로 지금도 기억하는 구루마(우마차)를 수리하는 가게, 불무로 불꽃을 피우며 시뻘건 쇠를 달구던 대장간, 양장점 그리고 배달하는 중국집 등 가게들이 없는 것이 없었던 신작로였다고 할까 . .

신작로를 중심으로 가게가 번성했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신작로 가게에 물건을 조달하는 푸줏간이나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두부집 밖에 없었다
 
그때, 부용역은 매일 이리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아침이면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또 타지방에 갈수 있는 창구로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 대전, 김제로 가기 위하여 멀리서도 찾아 왔으며, 역 창고에는 쌓인 비료푸대를 나르는 트럭들이 오가고, 부용 뜰에서 나는 쌀과 고구마 들이 잔뜩 쌓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신작로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는 용지, 공술 할것없이 더 멀리 짐자전거로 눈비가 오는 푹푹 빠지는 수렁길에도 실어 날랐다
부지런한 두부장사도 어깨에 메고 부용 황산까지 걸어가서 팔았다
그때 주위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부용 관내를 용지의 역골, 송산리, 임상리, 애통리, 백구의 백구리, 학동리까지 라고 생각된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천막으로 만드는 가설 극장은 주로 역앞 신작로 옆에 자리잡고 커다란 마이크 소리로 계속해서 '친애하는 부용 여러분 . .' 하면서 온 동네를 시끄럽게 유혹했으며 영화가 그 근방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였다
한창 영화 상영중에 비가 후두둑 내리면 어이쿠 하며 깔고 앉아있던 비료푸대나 신문지 등을 머리에 뒤집어 쓰곤 할수 밖에 . .

높은 위치의 경로당 옆자리는 이따금씩 찾아와 장화홍련전,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등을 분장한 배우들이 연극을 하여 주로 나이 드신 어른들을 즐겁게 해드리면서 위장약, 간장약 등 만병 통치약을 팔았었는데 우리집에도 마이크 소리가 크게 들려와 심심하던 나도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화장을 진하게 하며 준비하는 여자 단원들도 구경하였다

나중에 영화상영 하던 자리는 우체국 건물이, 약장수 공연하던 자리에는 파출소가 세워지고 나서 이따끔씩 찾아오는 시골 부용에서의 색다른 즐거움을 더 이상 맛 볼수 없게 되어 버렸다

또한 국민학교/중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먼곳에서 모여 들었었다
가을 운동회할 때면 그 근방 사람들이 작은 운동장을 꽉 메웠고 한쪽에 솥단지를 걸고 불을 피워 안주감을 데우고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오랫만에 만난 다른 동네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66년 초교 졸업할 때 40회로 이미 많은 선배를 배출했으며 3반 135명이 함께 졸업했었다

내가 교회 다닐 때는 수요일날, 어두운 밤길에도 공술에서 조장로는 혼자서 먼길을 걸어서 오갔으며, 끝나면 세절과 용지면 개투리까지 어두운 밤길을 데려다 주곤 했는데 칠흙같이 캄캄한 밤길을 눈을 크게 뜨고 길을 찾으며 한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래선지 먼 이웃 용지에 사는 내 친구도 부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알고 있었고 또한 우리 동창들의 서로 부모대에 맺어진 친척 관계를 이야기 하곤 했다

<신작로의 기억들>
승렬(중렬) : 역 가까이 살던 승렬이네 집과 가까우면서도 약간 까칠한 성격의 승렬이 얼굴이 떠오른다
부용역에 근무한다는 승렬이 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하여 역의 표 파는 작은 창구와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힐긋힐긋 근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전 점방 : 너른길에서 좁아지는 길목 양쪽에 점방이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 점방에 키도 얼굴도 약간 작으며 부지런하여 아들들을 데리고 점방 일을 하던 아저씨를 볼수 있었다

미미 이발관 : 지나가면서 가끔 보이는 깔끔하고 미남이셨던 이발관 명숙아버지, 나도 아버지를 따라 가서 여러번 머리에 명숙 아버지의 손길을 받았다

사진관 : 사진을 찍으러 갈 때나 학교 단체사진 찍을 때 만날 수 있던 신사같이 품위있게 보이는 말수가 적은 아저씨가 생각난다

주장집 : 그렇게 불린 양조장으로 그때 주로 짐자전거로 먼곳을 배달하였고 아버지도 가끔 도와 주었는데, 나는 큰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사러 안으로 들어가 술 익는 냄새를 맡으며 두리번거리며 구경했었다

구루마(우마차) 수리점 : 옴팍집 옆집으로 그때는 구루마 발통으로 둥근 나무바퀴 위에 철판을 입힌 바퀴가 달린 구루마를 타고 갈때면 엉덩이에 독. 독. 딱딱한 진동이 전달 되었는데, 타이어 바퀴로 바뀌면서 그 즈음 가게가 문을 닫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신작로 전봇대에 구루마 끄는 말이 매어 있어 애들과 함께 놀리는 노래하며 말의 아래를 쳐다 보기도 했다

옴팍집 : 방석집으로 잘 나가던 술집이었는데 신작로에서 유리창이 보이는 가게와 뒤 아랫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로, 가끔 가본 기억이 나는 키가 크고 덩치가 있던 아저씨가 있었다

옴팍집앞 고깃집 : 지나가면서 보이는 고기 가게는 고리에 걸려있던 갈비 고기들의 모습과 함께 초교 2년 선배만 생각난다

부용약국 : 통통한 우량아처럼 생긴 아저씨는 오랫동안 부용을 지키는 듯 하였고 나중에 자리를 앞쪽으로 옮겨서 계속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근방 사람들은 다들 한번 쯤은 아파서 그 약국에 들른적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상기씨 점방 : 아저씨와 함께 딸 크네기네 가게는 복실한 얼굴의 살짝 미소 때문에 가까운 곳을 두고 일부러 찾아 다녔다

연석이네 가게 : 연석 어머니와 연석이는 오래전 갔지만 어릴 때 항상 표정이 거의 없으며 장사하시던 연석 어머니 얼굴이 생각난다

창희네 점방 : 키가 작았던 아버지와 역시 작았던 창희형,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우리집 골목에서 신작로로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던 가게로 내가 많이 이용했었다

만화방 : 창희형 가게 옆에 새로 생겨 우리 엽집 낙희형이 운영했는데 연탄불에 만드는 따뜻한 앙꼬빵도 함께 팔아서 어린 애들이 많이 찾아 만화 속으로 빠져들던 곳이었지

시계포 : 더 어렸을 때 유리박스 아래에 시계가 진열되고 약간 키작은 아저씨가 생각 나는데 어느샌가 닫히더니 전기회사 출장소, 쌀가게, 자전거포, 생선가게로 변하였지만 그 후로는 문이 항상 닫겨 있었고 안채는 넓었으며 나중에도 시계포집으로 불렸다

영식 엄마 술집 : 우리집쪽 골목 입구의 코너에 있어 늘 안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포동통하고 친절한 2년 후배 영식이 엄마의 환한 얼굴이 생각난다

경성고무신 가게 : 영식엄마 술집 반대편의 경성고무신 가게는 대부분 검정 고무신으로 진열된 것을 볼수 있었으며 키가 큰 약간 흰머리 할아버지네 고무신 가게는 일찍 문을 닫았다

소금, 담배, 기름집 : 약간 어두운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서 담배나 기름을 받아와서 주인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원화당 약방 : 키가 작고 얼굴이 통통한 아저씨와 아들이 키가 컷던 1년 선배였는데 장사가 안되어서 인지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오복이네 고깃집 : 좀 사납게 보이기는 하나 마음씨 좋은 그집 어머니와 오복, 오봉 형제 등 우리 동네에서 살아서 어두운 흙담집 방에 세배 드리러 여러번 갔던 기억이 남

편물가게 : 실을 위에 걸어 놓고 늘어뜨린 실이 편물 기계가 옆으로 왔다 갔다 하며 계사쓰 짜는 것을 지나 가면서 볼수 있었으나 일찍 문을 닫았으며 얼굴이 가늘었던 2년 선배 택수형이 생각남

비단집 : 어릴 때 예쁘장하던 비단집 아주머니와 함께 가게안 뒤에 비단이 잘 정리되어 있는 모습, 그리고 좀 젊게 보이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일찍 문을 닫아 없어져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듯 하다

삼거리 이발소 : 면도 해주던 아저씨가 이어받아 주인하던 곳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곳 삼거리가 아마 부용 신작로에서 번화한 중심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삼거리 철물점 : 동창 현애네집으로 부지런하던 현애 아버지가 눈에 선하며 옆에 미장원 등 가게 세곳이 있었으나 현애네가 이사 가고 다른 가게들도 슬금슬금 언제 없어진지도 잘 몰랐다

쌀집, 쇠주집 : 쌀집은 영수 아버지가 운영했었고 코너 쇠주집에는 소주 대두병을 사러 가끔 찾아 갔었다
그 옆쪽으로 뚱굴이 아저씨로 불리는 아저씨가 사는 울타리 없이 이어지는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삼거리 세탁소 : 키작은 아저씨가 옷을 다리는 모습을 조용히 구경했었는데 연탄불을 이용하다가 나중에 전기줄이 연결된 다리미를 사용하면서 입에서 물을 뿜으며 옷을 다렸었다

그옆 음식점 : 약간 비스듬하게 들어간 술집으로 좀 외져 다른데 보다 일찍 문을 닫은것 같다

자전거포 : 2년 선배 운회형네 집으로 한때 자전거포 였었으나 일찍 닫고 몇가지 다른 일을 시도했던 것 같다
 
삼묵이네집 : 길가에 전까지 한의원을 한것으로 기억되며 선생님이던 누나와 똑똑하며 약간 까다로운 재묵이 형 모습이 떠오른다

그 옆 동동주 팔던집 : 거기에도 막걸리 받는 심부름으로 가끔 갔었다

호야네 자전거포 : 호야 아버지가 늘 가게에서 일하시고 호야도 가끔 도와주러 나왔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었는데 내가 객지로 나간 뒤로는 알 수 없었다

부용병원 : 길 바로 옆에 있던 병원 안에 들어가면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를 맡을수 있었고 하얀 가운에 엄하게 보이는 재희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뒷쪽으로 병원을 옮긴 뒤에도 가끔 찾아 갔으며, 낫으로 빈 나의 다리 상처도 꿰매 준 기억이 난다

훈식이네 방앗간 : 주로 떡 등을 찌던 방앗간으로 생각 나는데 훈식이저씨가 일찌기 돌아 가신 후 곧 문을 닫았다

그 앞 정미소 : 나중에 귀자네 시가집이 된 정미소로 그곳도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구경한 기억이 난다
1년 선배인 그분과 1년 후배인 동생은 거기에서 볼수 없었지

정성모네집 : 길가에 석유집 하던 가게의 왼쪽에 문과 담이 있고 담 너머로 안채가 살짝 보였었다

작은부대 삼거리 점방 : 고무신 가게를 함께 했는데 조금 이쁘장한 아줌마가 운영했고 크네기 점방이라 불렸다

그앞 이발소 : 우리 동네 복기 아줌마 남편, 눈이 큰 아저씨가 이발사였고 나도 가끔 이용했었다

그옆 약국 : 어릴 때 약을 사러 간 적이 있었으나 일찍 문을 닫은 것 같고 별로 남는 기억이 없다

대장간 : 또드락쟁이라고 불렀는데 길에서 약간 내려간 안쪽에 불무로 불며 불꽃을 피우고, 뻘겋게 달궈진 쇠를 다루는 아저씨를 가끔 볼수 있었고 아버지 심부름으로 중학교 가는 길쪽으로 그집 안채로 들어 간적이 있다

자빙이네 점방 : 지금도 만물상회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물건이 많아 사람들이 거길 지속적으로 찾는 것 같다

경덕이네 떡 방앗간 : 우리도 가래떡하러 많이 갔었다
지금도 부용 떡 방앗간 간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김수주 선생님집 : 길가에 있어 학교 오가는 길에 마루에, 부엌에서 나오는 것을 뵐 수 있었으며 나중에 선생이 된 따님도 부용국민학교에서 가르쳤었다

소사아저씨 점방 : 얼굴이 넓은 아줌마가 주로 운영하고 학교 바로 앞이라 우리 친구들이 많이 이용했었다
얍실한 얼굴에 부지런하던 아저씨는 우리가 졸업한 뒤에도 학교를 지킨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신작로에는 술집이 여러 곳이 한창 성업 중이었다

어른들은 기차 역에서 내려 친구를 만나면 역 앞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서 막걸리를 들었다
한잔 들어가면 한잔이 두잔 되고, 이제 술이 술을 먹게 만들며 거기를 나와 조금 떨어진 신작로 술집으로 2차를 가게 된다

거기서 또 다른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꽃을 피우다가 나와서 다시 신작로를 걸어 가다 보면 계속 이어지는 술집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래서 큰집 형수님은 저녁때만 되면 김제에서 근무하며 기차를 타고 오는 큰집 형님을 늘 기다리며 걱정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었다
그래서 나도 관심을 가지고 제일 잘 나가는 신작로 길옆 옴팍집 김이 서린 나무 틀 유리창 넘어로 옴팍집 안을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이야기하면서 막걸리 드는 것을 보았었다

그러니까 그런 신작로 술집들이 한창이었을 때가 부용이 한창 때이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된다

신작로 가게들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기억일 뿐 다들 나름대로의 추억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들이 궁금하기도 하다

어렸을 때 부용에는 내가 기억하는 아래와 같은 가게들이 있었다

대장간, 구루마 수리집, 철물점, 비단집, 양조장, 사진관, 쇠주집, 시계포, 자전거포 두곳, 양장점, 수예점, 미장원, 병원, 약국 2곳, 한의원 두곳, 세탁소, 이발소 세곳, 쌀가게, 생선가게, 고깃집, 석유/소금/담배집, 신발가게 두곳, 정미소 여섯곳, 점방 여러곳, 만화방, 풀빵집, 기름집, 떡방앗간, 중국집, 술집 여러곳.

세월 흐름따라 부용역이 폐쇄되고 그런 가게들도 하나 둘 문을 닫아서 이제는 인적이 드문 한산한 신작로가 되었지만 . .

그 시절 신작로 가게들이 양 옆으로 주욱 줄을 지어 나무로 만든 판자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연석이네 가게 앞에 오래되어 거무튀튀하게 퇴색한 가게의 나무 판자문을 들어 올리고 내려서 문틀에 차례 차례 끼우며 문을 닫던 연석 어머니 모습이 아련히 뇌리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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