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 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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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부용에 살면서 여러분은 집과 학교를 제외하고 어디까지 가 보았나요 ?
아마 학교, 역, 집만 왔다 갔다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한 어릴때 살던 고향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않나 생각한다
아주 어릴때 봉의산 옆 전주방향에 있는 산에 산토끼 잡으러 친구따라 간적이 있다
산토끼는 안보이고 봄철 산이 우거지지 않은 누런 잔디 위에 낮에 봉사가 된다는 부엉이가 저만치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잡을려고 살금살금 다가가 작대기로 내려 치려는 순간 알아채고 후루룩 도망가고 다시 몇번 시도했어도 마찬가지여서 그만 포기한 적이 있다
봉의산은 가까워 가끔 놀러갔던 우리들의 영역의 일부였었다
용지 사천산에 올라 갔었다
아마 3, 4학년때 쯤 분명 소풍을 간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높이는 봉의산보다 조금 더 높고 나무도 더 많았던 것 같았다
내려올 때 용지국민학교 쪽으로 내려오면 큰길이 나오면서 용지 시내가 사천산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죽신리에서도 부용역에 와서 기차를 탔으며 용지가는 길옆에 있고 그옆에서 갈라져 전주방향으로 한참가면 송산리가 나오는데 그곳 역시 부용관내 였었다
어두컴컴한 길 가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밤에 배웅 해주러 여러번 갔었다
역골은 동규가 친척집에 갈때 같이 갔으며 새절을 거쳐 논길을 지나 오른쪽에 사산리 방죽을 보면서 어덕을 넘어 논길을 건너가고 올때는 용지에서 오는길 쪽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월현대 사거리를 통해 돌아 왔다
꽤 멀지만 역골 또한 부용관내로 매일 부용역까지 걸어와 통학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새절은 남중 영국 점례 등 우리 친구들이 살고 있으며 오가며 저기가 점례오빠 정구섭 선생님댁하며 소개를 받았고 길이 약간 복잡하여 전형적인 시골부락이었다
학동리에는 조장로라는 분과 그 식구들이 있어 크리스마스때 온 산천이 하얀 가운데 눈길을 걸으며 새벽송을 하러 봉의산 끝자락의 옆길로 해서 몇번 가 본적이 있다
학동리도 부용교회로 다녔고 부용관내로 볼 수 있다
석담리는 먼저간 안상섭 집에 놀러 간적이 있으며 집뒤 대나무가 무성하고 뒷문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석담리에 그지역 이창렬씨가 도움을 주어 만든 분교가 생겨 2년 후배부터 백구초교로 다니게 되었으며 우리들은 초기 학교정리를 위하여 운동장 돌 치우기등을 하러 간적이 기억난다
졸업후에는 그쪽 사람들은 전주-군산도로를 이용하게 되어 부용과 왕래가 없어지고 멀어져 만날 기회가 없어진 것 같으며 우리 동창들만 이렇게 밴드란 끈으로 이어져 가끔 만날 수 있게 되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반월리도 마찬가지지만 면사무소가 있어 호적초본 주민등록등본을 띠러 여러번 갔고 또 부용에 갈려면 반월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석담리하고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면사무소에 가면 지금처럼 복사기가 없어 면서기 또는 대서소 아저씨가 손글씨로 써서 도장을 찍어 인증 받았는데 그 글씨가 전부 한자로 되어있었고 또 흘림체에 숫자도 약자로 되어있어 읽기가 매우 어려웠다
반월리에서 오면서 저기가 동창 노순남이네 집 하고 소개만 받았었고 지름길을 찾아 오는 길에 농원을 거치는데 남상준, 김인성네집 위치를 알게되고 지나서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왔었다
반월리에서 집으로 오는 길 중 백구리로 돌아오는 길도 있었다 백구리→가전리→성자동으로 돌아오기도 했었는데 꽤 먼거리였으며 길찾기가 상당히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학차를 기다리다 이리에서 친구들과 목천포 다리를 건너 철로를 따라 걸어오기도 했었다
이리-부용 거리가 7.2 km로 지금 생각하면 그리 멀지않은 거리 같은데 그때 약 2시간이나 걸리고 철로를 따라서 유강리→방개→수룡구지→목화동을 거쳐 걸어서 두번 왔었다
방개다리 근방에는 그쪽 동네 애들이 지나가는 학생을 혼내준다는 소문이 있어 긴장을 했었고 또 그럴 기미가 보여 조금 빨리 온적도 있었다
수룡구지는 손바닥 보듯 훤하나 성자동과 월현대는 가볼 기회가 별로없었다
월현대는 용진네집 가는 길에 저기가 조정림네, 저기가 영순네집 하고 소개를 받았고 밤에 병석이네 집에 간적이 있으나 동네가 꽤 크고 길도 아기자기해 지리를 잘 모르겠다
황산쪽으로는 부용역 철로를 건너면 황산까지는 직선도로로 멀고 또 황산초등학교 및 김제-익산도로가 있어 거의 왕래가 없었다
나는 조종리 선산갈 때와 공덕에 사는 사촌 누나가 살고 있는 공덕읍내까지 갔었다
공덕으로 가는 교통편이 없어 꽤 멀다고 느껴졌으나 세월아 네월아 하고 어릴때 걸어서 두번 간적이 있다
그러나 바쁘게 살다가 그만 왕래가 소원해져 친척이면서도 그냥 잊혀져 버렸다
그래서 거리가 멀면 마음도 자연 멀어진다고 친구던 친척이던 자식을 결혼시키던 가까이 하고 싶으면 물리적 거리가 가깝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래야 서로 도울수 있고 슬픔은 반부담, 기쁨을 두배로 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
이상은 대부분 고무신 신고 걸어다닌 나의 어릴적 동선이며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
물론 자가용이 일반화된 지금 부용에 가더라도 시골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가나 장사치가 아니면 대개 일정한 코스만 들르기 때문에 가보지 못하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시골길은 더 넓어지지 않은 것 같으며 포장이 되는 등 많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
또 자가용으로 쉽게 갈 수 있다 하여도 갈 필요없는 데를 일부러 가볼 수 없으니 이웃 동네로 가깝기는 하지만 지금도 그곳을 잘 모를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 가봐도 현재로서는 반가히 맞아주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을테니 . .
아마 학교, 역, 집만 왔다 갔다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한 어릴때 살던 고향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않나 생각한다
아주 어릴때 봉의산 옆 전주방향에 있는 산에 산토끼 잡으러 친구따라 간적이 있다
산토끼는 안보이고 봄철 산이 우거지지 않은 누런 잔디 위에 낮에 봉사가 된다는 부엉이가 저만치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잡을려고 살금살금 다가가 작대기로 내려 치려는 순간 알아채고 후루룩 도망가고 다시 몇번 시도했어도 마찬가지여서 그만 포기한 적이 있다
봉의산은 가까워 가끔 놀러갔던 우리들의 영역의 일부였었다
용지 사천산에 올라 갔었다
아마 3, 4학년때 쯤 분명 소풍을 간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높이는 봉의산보다 조금 더 높고 나무도 더 많았던 것 같았다
내려올 때 용지국민학교 쪽으로 내려오면 큰길이 나오면서 용지 시내가 사천산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죽신리에서도 부용역에 와서 기차를 탔으며 용지가는 길옆에 있고 그옆에서 갈라져 전주방향으로 한참가면 송산리가 나오는데 그곳 역시 부용관내 였었다
어두컴컴한 길 가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밤에 배웅 해주러 여러번 갔었다
역골은 동규가 친척집에 갈때 같이 갔으며 새절을 거쳐 논길을 지나 오른쪽에 사산리 방죽을 보면서 어덕을 넘어 논길을 건너가고 올때는 용지에서 오는길 쪽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월현대 사거리를 통해 돌아 왔다
꽤 멀지만 역골 또한 부용관내로 매일 부용역까지 걸어와 통학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새절은 남중 영국 점례 등 우리 친구들이 살고 있으며 오가며 저기가 점례오빠 정구섭 선생님댁하며 소개를 받았고 길이 약간 복잡하여 전형적인 시골부락이었다
학동리에는 조장로라는 분과 그 식구들이 있어 크리스마스때 온 산천이 하얀 가운데 눈길을 걸으며 새벽송을 하러 봉의산 끝자락의 옆길로 해서 몇번 가 본적이 있다
학동리도 부용교회로 다녔고 부용관내로 볼 수 있다
석담리는 먼저간 안상섭 집에 놀러 간적이 있으며 집뒤 대나무가 무성하고 뒷문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석담리에 그지역 이창렬씨가 도움을 주어 만든 분교가 생겨 2년 후배부터 백구초교로 다니게 되었으며 우리들은 초기 학교정리를 위하여 운동장 돌 치우기등을 하러 간적이 기억난다
졸업후에는 그쪽 사람들은 전주-군산도로를 이용하게 되어 부용과 왕래가 없어지고 멀어져 만날 기회가 없어진 것 같으며 우리 동창들만 이렇게 밴드란 끈으로 이어져 가끔 만날 수 있게 되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반월리도 마찬가지지만 면사무소가 있어 호적초본 주민등록등본을 띠러 여러번 갔고 또 부용에 갈려면 반월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석담리하고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면사무소에 가면 지금처럼 복사기가 없어 면서기 또는 대서소 아저씨가 손글씨로 써서 도장을 찍어 인증 받았는데 그 글씨가 전부 한자로 되어있었고 또 흘림체에 숫자도 약자로 되어있어 읽기가 매우 어려웠다
반월리에서 오면서 저기가 동창 노순남이네 집 하고 소개만 받았었고 지름길을 찾아 오는 길에 농원을 거치는데 남상준, 김인성네집 위치를 알게되고 지나서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왔었다
반월리에서 집으로 오는 길 중 백구리로 돌아오는 길도 있었다 백구리→가전리→성자동으로 돌아오기도 했었는데 꽤 먼거리였으며 길찾기가 상당히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학차를 기다리다 이리에서 친구들과 목천포 다리를 건너 철로를 따라 걸어오기도 했었다
이리-부용 거리가 7.2 km로 지금 생각하면 그리 멀지않은 거리 같은데 그때 약 2시간이나 걸리고 철로를 따라서 유강리→방개→수룡구지→목화동을 거쳐 걸어서 두번 왔었다
방개다리 근방에는 그쪽 동네 애들이 지나가는 학생을 혼내준다는 소문이 있어 긴장을 했었고 또 그럴 기미가 보여 조금 빨리 온적도 있었다
수룡구지는 손바닥 보듯 훤하나 성자동과 월현대는 가볼 기회가 별로없었다
월현대는 용진네집 가는 길에 저기가 조정림네, 저기가 영순네집 하고 소개를 받았고 밤에 병석이네 집에 간적이 있으나 동네가 꽤 크고 길도 아기자기해 지리를 잘 모르겠다
황산쪽으로는 부용역 철로를 건너면 황산까지는 직선도로로 멀고 또 황산초등학교 및 김제-익산도로가 있어 거의 왕래가 없었다
나는 조종리 선산갈 때와 공덕에 사는 사촌 누나가 살고 있는 공덕읍내까지 갔었다
공덕으로 가는 교통편이 없어 꽤 멀다고 느껴졌으나 세월아 네월아 하고 어릴때 걸어서 두번 간적이 있다
그러나 바쁘게 살다가 그만 왕래가 소원해져 친척이면서도 그냥 잊혀져 버렸다
그래서 거리가 멀면 마음도 자연 멀어진다고 친구던 친척이던 자식을 결혼시키던 가까이 하고 싶으면 물리적 거리가 가깝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래야 서로 도울수 있고 슬픔은 반부담, 기쁨을 두배로 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
이상은 대부분 고무신 신고 걸어다닌 나의 어릴적 동선이며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
물론 자가용이 일반화된 지금 부용에 가더라도 시골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가나 장사치가 아니면 대개 일정한 코스만 들르기 때문에 가보지 못하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시골길은 더 넓어지지 않은 것 같으며 포장이 되는 등 많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
또 자가용으로 쉽게 갈 수 있다 하여도 갈 필요없는 데를 일부러 가볼 수 없으니 이웃 동네로 가깝기는 하지만 지금도 그곳을 잘 모를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 가봐도 현재로서는 반가히 맞아주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을테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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