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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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7-11 08:26 조회 2,238 댓글 0본문
어린나이 한창 성장기에 있던 우리들에게는 항상 배가 고팠었다
밥을 듬뿍 먹었어도 조금 지나면 고프고 또 궁금하여 뭔가 먹고싶고 . .
하기야 시골 밥상이 늘 푸른 초장이었으니 소화가 빠를 수 밖에
그럴때면 무엇보다 더 우리의 배고픈 위를 체워줄 수 있었던 것은 고구마였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 였었지만 우리집에도 작은방 한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작은 성을 만들어 밭에서 캐온 고구마를 쌓아놓고 겨우내내 먹었었다
보통 겨울에는 어머니가 고구마를 따로 찌거나 밥할 때 얹혀서 쪄 주었지만 그래도 입이 심심하면 생고구마를 많이 깍아 먹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길가의 고구마를 살짝 캐서 껍데기를 자기 바지나 풀밭에 쓱쓱 문질러 생고구마로 먹기도 했었다
근데 나는 생고구마를 조금 먹으면 속이 쓰리더라고 . .
감자는 생으로 깍아서 먹어 봤었지만 이건 영 맛이 아니올시다 이었으며 어머니가 쪄 줄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지.
우리집 가시나무 울타리 아래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혼자 저절로 자란 돼지감자가 자라고 있어 이것을 캐다가 쪄 먹었었다
맛은 비록 없었고 싱거웠었다
지금은 뭐 ! 다이어트, 당뇨, 암 등에 효능이 있다나 . .
여를철 별미는 무엇보다도 텃밭 가장자리에 심은 단수수였으며 우리 다섯 형제에게는 그게 딴수수 열매가 거무스럽게 익기만 기다리렸었다
잘 익은, 씹을수록 단물이 입안으로 흘러 나오는 그맛 . .
잘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크면 이건 내것, 저건 누나것 하고 미리 찍어 놓기도 했었다
우리들 한테는 달디단 물이 나오는 사탕수수였다
빗자루를 만들때 쓰는 수수도 비슷하게 생겨서 수수대를 꺽어 한번 씹어 보았었지만 역시 맛이 없었다
아마 단수수는 그대로 열대지방에 심으면 사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일거라 생각했다
울타리가 탱자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탱자나무 건너 이웃집에 빠알갛게 잘 익은 앵두가 잔뜩 열려 유혹하고 있어 늘 보아오다 참지못해 탱자가시가 팔목을 찌르는 것을 무릎쓰고 손을 길게 뻗어 몇개 따 먹었었지
그렇게 맛있더라고 . .
원래 몰래먹는 그 뭐시냐 그런 것들이 참 맜있는 거라고 ㅎㅎ
물론 그때에도 참외, 수박, 포도 등 과일은 있었지만 가난했던 우리들 한테는 그림의 떡이었고 여름철 그것들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외에 반찬을 하기위해 심어놓은 까지를 이따금 따 먹었었지
우리 반찬을 위해 키우시는 어머니 꾸중을 듣지않기 위하여 표시가 나지않게 슬금슬금 하나 둘 따서 몰래 따 먹었으며 생가지가 가지는 고유의 맛이 있어 혼자 몰래 그 맛을 즐길 수 있었지
그러나 가지도 많이 먹으면 입가에 가짓색(자색)이 띄어 거울을 보고 여러번 입가를 세게 닦았었다
여름철 텃밭에 심은 물외라고 불리는 장아치를 담는 장아찌외도 심심할때 깍아서 먹었었는데 아무 맛도 없는 맹탕이지만 그래도 오이와 같은 물이 가득하므로 그냥 입을 심심치 않게 하는데 의미로 삼았었다
아버지는 그 물외를 따다 이리시장에 갔다 팔았고 우리 학비를 마련했었다
논밭에서 나는 것을 제외하고 군것질 거리의 으뜸은 그 무엇보다도 엿을 들 수 있겠다
그때 돈이 없었기 때문에 헌고무신, 빈병, 철로된 물건(녹이 잔뜩 슬어 부풀어 올랐어도) 등이 모이면 엿장수를 기다리곤 했으며 뭉퉁하게 생긴 엿장수의 가윗 소리가 '짤칵짤랑' 들리면 그것을 들고 기다렸다는듯이 뛰어나가 엿판 옆에 서서 주는 엿을 쳐다 보곤하였다
엿장수는 가져온 물건을 보고는 넓고 납작하게 생긴 하나의 엿판에서 정 같은 것과 엿장수 가위로 엿을 툭툭 두드려 잘라 주는데 물론 가져온 물건값을 쳐서 비례하게 자른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엿장시 말대로 엿판 한쪽에서 부터 갈라 주었다
그래도 그것은 곧 우리들의 꿀맛같은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고 식구 모두가 나눠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넓적한 엿판이 줄어 들려고 하면 길가의 약간 더러운 물에도 손을 잠깐 행구고 엿판을 눌러서 얇고 더 넓게 만들어 판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었지만 . .
어릴 때 처음에는 엿판을 지게로 지고 다녔고 부르면 지게를 받치고 엿판에서 줬었다
나중에는 리어카에 우리들이 보기 쉽게 놓여져 있었다
엿은 밀가루 바탕에 넓적지근한 그냥 엿판이던 것이 엿 위에 빨강 파랑 울긋불긋 꽃물들을 위에 흩 뿌려 더 보기에 좋았었다
다음에는 엿판과 함께 한쪽에 길다랗게 뽑은 엿을 준비하였다가 잘라서 주기도 했고 후에 비비 꼰 엿을 팔기도 했다
나중에 엿장시 아저씨가 월연대 사거리 지금의 용지로 가는 버스길 옆에 사는 곳 두군데를 알기에 그쪽을 지나갈 때마다 흘긋흘긋 엿장시 아저씨가 잔뜩 모아놓은 고물더미를 볼 수 있었는데 . .
얼마 전부터 '엿먹아라'는 욕지꺼리로 들을 수가 있는데 그 맛있는 엿을 왜 먹으라고 하고 또 그게 왜 욕으로 성립되는지도 유래가 뭔지 아직도 통 이해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 5,6 학년때쯤 '아이스께끼' '얼음과자 ~♪'라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외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더위에 지칠때면 가끔 없는 돈을 마련하여 사먹은 기억이 난다
과연 그맛은 한여름 더위를 몰아가는 꿀맛이었으며 어릴때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 클때까지 아이스께끼나 아이스크림은 더운 여름철에나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만 먹는 비싼것 이었는데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면서 뭣이 좋다고 먹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아이스께끼가 얼마였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약 1~2 원 되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더위를 가시게 하는 그 시원한 맛도 잠시 뿐이었고 . .
어떤 친구는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며 더위를 참지를 못하여 하나씩 꺼내 먹었던 것이 통이 비워지고 팔것이 없어져 버렸다는 녀석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일은 하나의 돌아올 수 없는 추억으로만 뇌리에 남아있게 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밥을 듬뿍 먹었어도 조금 지나면 고프고 또 궁금하여 뭔가 먹고싶고 . .
하기야 시골 밥상이 늘 푸른 초장이었으니 소화가 빠를 수 밖에
그럴때면 무엇보다 더 우리의 배고픈 위를 체워줄 수 있었던 것은 고구마였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 였었지만 우리집에도 작은방 한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작은 성을 만들어 밭에서 캐온 고구마를 쌓아놓고 겨우내내 먹었었다
보통 겨울에는 어머니가 고구마를 따로 찌거나 밥할 때 얹혀서 쪄 주었지만 그래도 입이 심심하면 생고구마를 많이 깍아 먹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길가의 고구마를 살짝 캐서 껍데기를 자기 바지나 풀밭에 쓱쓱 문질러 생고구마로 먹기도 했었다
근데 나는 생고구마를 조금 먹으면 속이 쓰리더라고 . .
감자는 생으로 깍아서 먹어 봤었지만 이건 영 맛이 아니올시다 이었으며 어머니가 쪄 줄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지.
우리집 가시나무 울타리 아래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혼자 저절로 자란 돼지감자가 자라고 있어 이것을 캐다가 쪄 먹었었다
맛은 비록 없었고 싱거웠었다
지금은 뭐 ! 다이어트, 당뇨, 암 등에 효능이 있다나 . .
여를철 별미는 무엇보다도 텃밭 가장자리에 심은 단수수였으며 우리 다섯 형제에게는 그게 딴수수 열매가 거무스럽게 익기만 기다리렸었다
잘 익은, 씹을수록 단물이 입안으로 흘러 나오는 그맛 . .
잘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크면 이건 내것, 저건 누나것 하고 미리 찍어 놓기도 했었다
우리들 한테는 달디단 물이 나오는 사탕수수였다
빗자루를 만들때 쓰는 수수도 비슷하게 생겨서 수수대를 꺽어 한번 씹어 보았었지만 역시 맛이 없었다
아마 단수수는 그대로 열대지방에 심으면 사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일거라 생각했다
울타리가 탱자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탱자나무 건너 이웃집에 빠알갛게 잘 익은 앵두가 잔뜩 열려 유혹하고 있어 늘 보아오다 참지못해 탱자가시가 팔목을 찌르는 것을 무릎쓰고 손을 길게 뻗어 몇개 따 먹었었지
그렇게 맛있더라고 . .
원래 몰래먹는 그 뭐시냐 그런 것들이 참 맜있는 거라고 ㅎㅎ
물론 그때에도 참외, 수박, 포도 등 과일은 있었지만 가난했던 우리들 한테는 그림의 떡이었고 여름철 그것들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외에 반찬을 하기위해 심어놓은 까지를 이따금 따 먹었었지
우리 반찬을 위해 키우시는 어머니 꾸중을 듣지않기 위하여 표시가 나지않게 슬금슬금 하나 둘 따서 몰래 따 먹었으며 생가지가 가지는 고유의 맛이 있어 혼자 몰래 그 맛을 즐길 수 있었지
그러나 가지도 많이 먹으면 입가에 가짓색(자색)이 띄어 거울을 보고 여러번 입가를 세게 닦았었다
여름철 텃밭에 심은 물외라고 불리는 장아치를 담는 장아찌외도 심심할때 깍아서 먹었었는데 아무 맛도 없는 맹탕이지만 그래도 오이와 같은 물이 가득하므로 그냥 입을 심심치 않게 하는데 의미로 삼았었다
아버지는 그 물외를 따다 이리시장에 갔다 팔았고 우리 학비를 마련했었다
논밭에서 나는 것을 제외하고 군것질 거리의 으뜸은 그 무엇보다도 엿을 들 수 있겠다
그때 돈이 없었기 때문에 헌고무신, 빈병, 철로된 물건(녹이 잔뜩 슬어 부풀어 올랐어도) 등이 모이면 엿장수를 기다리곤 했으며 뭉퉁하게 생긴 엿장수의 가윗 소리가 '짤칵짤랑' 들리면 그것을 들고 기다렸다는듯이 뛰어나가 엿판 옆에 서서 주는 엿을 쳐다 보곤하였다
엿장수는 가져온 물건을 보고는 넓고 납작하게 생긴 하나의 엿판에서 정 같은 것과 엿장수 가위로 엿을 툭툭 두드려 잘라 주는데 물론 가져온 물건값을 쳐서 비례하게 자른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엿장시 말대로 엿판 한쪽에서 부터 갈라 주었다
그래도 그것은 곧 우리들의 꿀맛같은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고 식구 모두가 나눠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넓적한 엿판이 줄어 들려고 하면 길가의 약간 더러운 물에도 손을 잠깐 행구고 엿판을 눌러서 얇고 더 넓게 만들어 판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었지만 . .
어릴 때 처음에는 엿판을 지게로 지고 다녔고 부르면 지게를 받치고 엿판에서 줬었다
나중에는 리어카에 우리들이 보기 쉽게 놓여져 있었다
엿은 밀가루 바탕에 넓적지근한 그냥 엿판이던 것이 엿 위에 빨강 파랑 울긋불긋 꽃물들을 위에 흩 뿌려 더 보기에 좋았었다
다음에는 엿판과 함께 한쪽에 길다랗게 뽑은 엿을 준비하였다가 잘라서 주기도 했고 후에 비비 꼰 엿을 팔기도 했다
나중에 엿장시 아저씨가 월연대 사거리 지금의 용지로 가는 버스길 옆에 사는 곳 두군데를 알기에 그쪽을 지나갈 때마다 흘긋흘긋 엿장시 아저씨가 잔뜩 모아놓은 고물더미를 볼 수 있었는데 . .
얼마 전부터 '엿먹아라'는 욕지꺼리로 들을 수가 있는데 그 맛있는 엿을 왜 먹으라고 하고 또 그게 왜 욕으로 성립되는지도 유래가 뭔지 아직도 통 이해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 5,6 학년때쯤 '아이스께끼' '얼음과자 ~♪'라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외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더위에 지칠때면 가끔 없는 돈을 마련하여 사먹은 기억이 난다
과연 그맛은 한여름 더위를 몰아가는 꿀맛이었으며 어릴때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 클때까지 아이스께끼나 아이스크림은 더운 여름철에나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만 먹는 비싼것 이었는데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면서 뭣이 좋다고 먹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아이스께끼가 얼마였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약 1~2 원 되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더위를 가시게 하는 그 시원한 맛도 잠시 뿐이었고 . .
어떤 친구는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며 더위를 참지를 못하여 하나씩 꺼내 먹었던 것이 통이 비워지고 팔것이 없어져 버렸다는 녀석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일은 하나의 돌아올 수 없는 추억으로만 뇌리에 남아있게 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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