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신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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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웃음 작성일 21-12-27 18:51 조회 2,097 댓글 0본문
부용에서 가게들은 신작로에 모두 있어 뭘 살려면 신작로로 갔다
월현대 방향인 우리집 쪽에서 신작로로 들어서면 마주한 곳에 시계포가 나왔다
거기가 신작로 가운데 쯤 될 것이다
시계포 자리는 어렸을 때 시계를 큰 유리박스에 진열하고 시계를 수리하던 곳이었으나 문을 닫은 후에는 여러 가게가 열었다 닫었다 했다
시계포 다음으로 전기회사 출장소, 쌀가게, 자전거포, 옆집 완수네가 운영하던 생선가게가 마지막 주인으로 바뀌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완수네 아저씨가 불의의 사고로 방게 근방에서 돌아가신 뒤에는 그곳은 그냥 빈곳이 되고 . .
그 옆이 이웃집 낙희형이 운영하던 만화가게 였었는데 함께 풀빵장사를 한동안 했었다
그옆이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던 2년선배 이창희네 가게 였는데 우리집에서 가까워 많이 이용했다
거기서 공책과 연필을 샀고 큰 유리병속에 있던 설탕이 약간 뭍어있는 큰 사탕, 눈깔사탕과 진열된 샘비과자 생각이 난다
진열된 마른 오징어도 가끔 불필요한 부위를 뜯어서 먹었었다
그 옆에는 미장원이 있었으나 어릴 때 곧 문닫었다
그옆 점방이 서연석이네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였다
좀 냉랭하게 보이는 연석이 어머니가 주로 운영 하셨었지
초등학교때 연석이와 교회도 함께 다녀 잘 지냈고 연석이네 안채에서 종길이와 6학년때 잠깐 동안 같이 공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종길이가 오지않아 연석이와 함께 종길이네 집에 데리러 간적이 두번 있었다
그 시절에도 연석이는 좀 짖궂었는데 공부하다가 방 창호지문 구멍난 사이로 그것을 집어놓고 오줌 누기도 했었다
연석이네 점방 옆길이 수룡귀지 가는 길이고 그길 건너편에 부용약국이 있었다
약국은 어렸을 때 체했다고 까스활명수를 내몸이 약하다고 어머니가 원기소를 사기 위해 많이 찾았었다
약국 아저씨는 통통하고 건강한 체격에 늘 우리를 반갑게 맞이 했었는데 약국을 나중에 옴팍집 옆으로 옮겼다
수룡구지 방향으로 약간 더 들어가면 왼쪽에 방앗간이 있었고 방앗간 뒷문은 주장집 마당으로 통했다
우리도 농사를 지어 아버지를 따라서 좀 어둠컴한 그 방앗간에 가끔 갔었다
당시 부용에는 방앗간들이 많아 경쟁을 하였고 나중에 우리 나락을 사거리 방앗간에서 와서 소구루마로 실어 갔다
약국 옆에는 가끔 옛날에 과일 등을 파는 가게를 열어 추석 가까이에 감을 아버지가 한 무더기 사오신 적이 있었다
그 바로 옆이 오복이 형네 친척인 큰집에서 하던 고깃집이었다
그 옆이 양조장으로 우리는 주장집으로 불렀다
아버지가 논일을 할때 샛거리와 함께 가지고 가려고 막걸리를 주장집에서 내가 받아 왔다
지금은 그런 주전자를 찾아 볼 수 없는 큰 주전자(20 리터)를 가지고 가면 안쪽에서 가득 부어 주셨다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었고 옆에 있는 정미소 뒷문에 가보고 돈을 내면 땡그렁 소리가 나면서 열리며 꺼내 잔돈을 바꿔주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현금 박스도 생각난다
그리고 신작로에서 주장집 옆 뒷쪽으로 가는 길은 수룡귀지로 가거나 토끼산을 넘어 논에 가는 길로 내가 주로 다니던 비교적 한적한 길이었다
한편 다시 우리집 쪽에서 신작로에 들어서면 왼쪽 코너에 비교적 예쁘장한 영식엄마의 밥과 술을 파는 집이었다
그 옆은 생선가게 였었는데 앞에 판을 벌리고 꽁치와 갈치, 고등어를 진열하여 팔았고 가끔 우리도 이용했다
그 옆에 삼거리 정미소가 있었는데 송방집 방앗간이라 불렀다
나락을 맽겨놓고 찟고있는 동안 기다리면서 햇볕이 드는 안채로 가서 큰 오리들이 꽥꽥 거리거나 이상한 꽃벼슬을 한 칠면조가 있어서 구경하였었다
정미소 안쪽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며 소리나는 곳, 나락이나 쌀이 이동하는 것이 보이는 곳을 들여다 보며 나락이 찌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려 애썼었다
나중에 쌀이 나오고 또한 맵재가 나오면 가마니에 담는것이 일이었다
방앗간에서 햐이얀 쌀이 나오는 것과 밀을 가져가면 하이얀 밀가루가 되어 나오는 것이 신기하게도 여겨졌다
그옆집은 김상기씨댁 점방이었는데 아줌마와 그집 딸래미가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줘 나중에는 그곳을 많이 이용했다
그옆은 내가 초교 초기시쯤 양장점이 있었는데 문 닫은 뒤 나중에 약국이 옮겨 간 자리이고 아마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 옆집은 옴팍집이라고 길옆에 위쪽에 술, 음식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안쪽 아래채에서도 술을 들었고 아래로 움푹 들어가 있어 옴팍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옴팍집 옆에 구루마를 수리하는 철공소가 있었다
지나 다니면서 나하고 별로 관계없는 곳이라 관심이 없었는데너무 어려서 일이라 다들 기억이 없을것이라 생각한다
그 옆에 가게가 있었는데 위치가 안좋아서 그랬는지 나중에 닫은 것 같다
그 옆집은 어릴때 방앗간을 했었는데 일찌갈치 고만 두었다
조항래라고 이년 후배가 살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완병네집 내려가는 골목건너서 코너에 부용사진관이 있었지
그옆이 짜장면집으로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옆이 미미이발관, 아버지도 나도 깍으러 여러번 갔었지
잘하면 명숙이도 만나고 . .
그옆이 주재영네 기름집 . .
그옆이 소방서차 대기장
그옆이 파출소 . .
영호가 방위로 근무했던 곳
소방차고와 파출소는 원래 없었는데 나중에 지었고 건물이 없었을 때 순회공연 약장수가 가끔 그 밭에 가설 무대를 차려놓고 동네방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장화홍련전, 흥부전, 심청전 등 우리 고전을 그럴듯하게 공영하고 약을 팔던 곳이다
그때 생각하기에 저게 정식으로 약회사가 생긴다던데 하며 궁금했고 종고교 다닐때 그게 종근당이나 될까 하고 생각한적이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 .
다시 신작로 시계포집으로 불리던 우리집으로 가는 골목 바로 앞쪽의 오른쪽에는 원화당약국이 있었다
거기에 살던 점잖고 키가 약간 작았던 할아버지와 초교 일년 선배가 살은 것으로 생각난다
그옆집은 부용이발소로 보조로 이발하던 사람이 이어 받으며 계속되었는데 어릴 때 키가 작아서 내가 이발소 의자 팔 괴는 손잡이 양쪽에 판대기를 얹혀놓고 머리깍은 기억이 난다
그 옆에는 창고 같은 건물에 초교동창 정영수 아버지가 하던 쌀가게가 있었다
그옆은 전에 시장이었던 같은 집들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성결교회로 가는 길이 생겼다
그쪽끝 코너에 소주를 벽에 층층으로 진열해 놓고 팔았던 소주, 정종을 팔아서 그곳에도 심부름으로 정종 대도병을 사가지고 온 기억이 있다
삼거리의 학교방향 삼각지에는 현애네 집이 있었고 길쪽 가게는 세군데를 했었는데 쇠주집 쪽으로 가상에 미장원이 있었다
동네 아가씨, 아줌마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을 지나 다니면서 보아왔다
그옆에 가게가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으며
그옆집이 현애 아버지가 하시던 철물점이었다
가끔 못, 철사 등을 사러 심부름 갔었다
현애 아버지와 함께 우리 어머니와 비교적 가까이 지내시던 현애엄마, 키크고 말발이 세던 보석이형, 고교때 걷는 모습이 믿음직하게 보이던 현석이 집안채에도 초가집이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가본적이 있어 기억이 난다
거기서 학교 쪽으로 아버지와 형제들 특히 2년선배 운회형네가 한때 물집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자전거포를 하기도 했었다
그 옆집이 삼묵이네 집이다
황은묵 선생, 재묵이형 등이 있었다
그 다음집은 잘 생각이 안난다
길에 면한 문이 있던 집이었는데 그때 동동주를 팔아서 가끔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술을 가질러 가본적이 있다
그 다음이 병원 재희네 병원과 집이 있었다
초기에는 골목길 앞에 간판이 있었고 대기실, 진료실이 있었는데 나중에 뒷쪽 반월리 가는 길쪽으로 새집을 지어 옮겼다
낫으로 내 발목 위를 베어 피를 많이 흘리면서 재희 아버지에게 치료 받은 것이 엊그제 같다
한편 다시 우리집 쪽에서 신작로로 올라가면 오른쪽 코너에 경성고무신 이란 간판과 함께 신발을 진열하던 고무신가게가 생각난다
우리집쪽 길에 살던 키가 크던 할아버지가 하셨던 가게이다
신발가게와 함께 담배라는 작은 광고판을 언제나 볼 수 있었으며 가게는 집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고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과 함께 등잔불을 밝히기 위한 대도병에 기름을 받아 오는 것이 내 임무였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담배 애호가로 상황이 나을 때는 진달래 갑담배로 안 좋을 때는 풍년초 봉초 심부름을 했었는데 봉초를 까서 깨끗한 창호지 같은 곳에 말아 피우다가 때로는 신문지로 더 안 좋을 때는 호박잎으로 말아서 피셨다
지금 살아 계셨다면 건강에 안 좋긴 하지만 최고로 비싼 좋은 담배를 한보로 사드리고 싶은데 안 계시네요
이 글을 쓰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 .
그옆집은 우리동네 오복이네 고깃집이 있었다
그 옆집은 2년 선배 택수네 집으로 계샤쓰와 털실을 취급하던 곳이었다
당시 지나 가면서 유리창 안으로 편물기계를 놓고 뭔가를 짜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도 계샤쓰 윗도리, 장갑, 양말 등을 누나가 짜면서 직접 계실을 누나가 사오신 것으로 생각된다
부용 신작로에도 양장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영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옆이 비단가게 포목점이었다
가게 안에 포목을 세로로 나란히 세워놓고 비단집 단정하고 예쁘장한 아주머니가 장사하셨다
서정림 이란 성결교회 집사와 남동생이 성결교회에 장로로서 주된 역할을 하고 나중에 땅을 팔아 교회를 새로 짓는데 앞장서 온 분이 계셨었다
그옆 골목 넘어 세탁소가 있었다
당시 전기도 들어와 있었지만 전기료가 아까워 난로위에 다리미를 올려 놓았다가 뜨거워진 것으로 물을 뿌리며 칙 소리가 나면서 다리미로 옷을 대린 것이 생각이 난다
그 옆집은 길에 약간 비스듬하게 면한 술집이었었다
그옆집은 잘 기억이 안나고
그 옆집이 뒷쪽에 큰 기와집으로 남쪽 코너에 문이 있었고 동창 임갑순이 한쪽에 살던 집이다
그옆 옛 성결교회 사이 골목길은 최종화네가 사는 나중에 전기회사 간판마져 옮겨 단 큰 기와집이 있었다
건너편 삼묵이네집 앞쪽으로 옛 성결교회가 있었고 나도 어머니 따라 부흥회에 몇번 넓지않은 교회에 간적이 있다
그옆이 황호야네 자전거포이다
지나 다니면서 호야 아버지가 자전거를 수리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나도 가끔 수룡구지 매형 자전거에 바람 넣으러 간적이 있다
그때가 신작로가 한참 번성하던 시기로 생각된다
기차역이 있었고 큰 트럭은 있었으나 버스, 택시 등이 부용에서는 볼 수 없었다
주된 신작로조차 비가 오면 구루마나 트럭 바퀴 자국으로 깊게 두줄이 나고 군데군데 물구덩이가 흙탕물로 차있고 비온 다음에는 질턱하여 고무신과 바지가랭이를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상자리로 조심스럽게 피하여 다니고 깨금짚거나 폴짝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신작로가 더 번영했을지도 모른다
황산이나 공덕에서도 물건사러 부용으로 왔고 백구 분교가 없었으며 교회를 학동리에서도 용지 죽신리, 송산리에서도 왔었으니까
저녁때가 되면 역전에서 부터 옴팍집을 거쳐 영식엄마가 운영하는 술과 음식을 파는 집들이 항시 떠들썩 했었다
신작로에는 또한 가게들이 많았다
우리집 골목 바로 앞에 시계를 판매 진열하고 수리하는 시계포
시계포 자리는 시계포가 없어지고 자전거 수리, 쌀집, 그리고 완수네 아저씨가 하던 생선가게가 있었다
그 옆에는 중학교 무렵 옆집 낙희형이 하던 만화방이 꽤 오래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작으마한 이창희 형네 아버지가 점방을 하고 창의형도 가끔 거들었다
창희형네
골목 코너에 왼쪽은 영식엄마가 하는 밥집에 가끔 달걀 팔러 갔었다 , 오른쪽에는 담배 소금집으로 아버지 담배 심부름과 등잔에 넣을 기름사러 대도병을 들고 갔었지
옛날에는 거기에 경성고무신집이 있었는데 문을 닫고 담배, 기름, 소금만 발았다
그 앞에 학교방향으로 원화당약방, 원화당 약방에는 1년 선배가 살았었다
건너편에 비단집, 비단집은 어머니와 아들이 성결교회에 열심하여 교회 옮기는데 앞장 섰었다
그 앞 삼거리 이발소에서 어릴때부터 내머리를 많이 깍았었다
삼거리 현석이네 쪽 코너에 가게가 셋 있었는데 오른쪽엔 현석이네 철물점, 중간은 미장원, 왼쪽은 생각이 안난다
삼거리 비단집 쪽 건너편 세탁소가 있었으며 스팀다리미로 키작은 아저씨가 옷을 다리던 모습이 선하다
정미소가 여러곳 있어 골라서 방아를 찧었는데 영단, 주장집 앞, 수룡귀지 가는 신작로길, 수룡귀지길로 들어서 왼쪽, 훈식이네, 그 앞집 권오혁이네. 사거리 방앗간 7군데나 되었다
점방도 역전 길에서 좁아지는 곳 양쪽 두곳, 주장집 앞, 수룡구지 가는 길 삼거리 코너에 연석이네, 그 건너편, 우리집쪽 골목앞 1년선배 이창희네, 학교근방 삼거리 큰애기 점방, 조자빙네, 학교앞 소사아저씨네, 그앞집 8군데 있었다
이발소는 미미이발관, 삼거리, 큰애기 점방네 앞 그리고 없어진 곳 등이 있었다
기차역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서 한잔 걸치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2차 3차를 하여 이상으로 신작로의 술집들이 한창인 때가 있었다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바깥으로 나돌며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간이 나빠지거나 간디스토마 등 작은 병이 걸려도 원인 파악과 치료할 수 있는 60년대 의술이 빈약했기 때문에 일찍 돌아 가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행복하던 시골 가정들도 어른 한사람이 돌아 가시면 그집은 집안이 풍지박산이 났었고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면서 살아 왔었다
옆집 영식이네 아버지, 종태, 오진, 창순, 방앗간 훈식이네, 외삼촌, 매형 그리고 우리 아버지 . .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내가 고등학교 줄업한 해에 돌아 가셨는데 오래전에 외삼촌이 7남매 그리고 매형도 어리디 어린 7남매를 남겨놓고 먼저 가셨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뒤 나중에 만난 권오진 여동생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 공장에 취직하러 떠나고 남동생 오주는 나중에 원대 야간을 다니면서 돈 없어 학교를 책 없이 다녔다
한 가정의 정신적 경제적 기둥이자 가족을 먹여 살리던 어른이 돌아 가셨으니 일단 가진 풍부한 재산이나 하던 일거리가 있는 집을 제외하고는 먹고 살일이 막막했던 집이 대부분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그때 옆에 항상 있어주어 사랑해주고 의지하던 기둥이 별안간 사라졌으니 이제 낳아놓은 여러명의 자식 틈바구니에서 자식들과 부데끼면서 살아야 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과 자신만의 삶을 포기하며 정욕을 억누르고 극히 어려운 상황을 살아 왔으리라 생각한다
그걸 한편으로 희생과 인내라고 지금 생각한다
그뒤로 정부의 둘만 낳자는 산아정책 시행에 따라 가족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우리 세대가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으며 나 또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즉 자연의 섭리를 정부정책이 의술을 이용하여 상황을 변경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후유증을 이 시대가 겪고 있다고 보지만 . .
우리의 어린시절에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었다고 하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넷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ㅎㅎ. .
거기에 도시화와 함께 아파트 문화로 점입하여 점점 이웃과의 벽이 두툼하게 되고 핵 가족화가 진행되어 아파트 옆집 사람도 전혀 모른채 지내게 되었다
이제 둘만 낳아 잘 기른 우리 세대들은 독립하여 나가버린 자식들로 인하여 대부분 둘만 남게되고 또는 한사람이 먼저 간 사람은 더욱 더 혼자만의 공간에서 외로움을 달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조금 있으면 어짜피 다들 혼자가 되겠지만 . .
우리들이 어렸을때 삼대가 같이 지낼 수 있고 어른 대접을 받으며 또 늘 손자가 크는 것을 보면서 살았을텐데 이제 자식 며느리의 식사대접을 받지 못하고 둘이서 혹은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기둥이 없어짐에 따라 단단한 연줄로 이어진 줄이 끊어지고 친척간 이웃간에도 멀어지고 또 찾아갈 명분이 없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도 장인, 장모가 돌아가신 후 처가에 가지 않고 있으며 갈 명분도 사라졌다
친구들과 이야기 중에 10남매가 어른되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들으며 부러워 했었는데 그중 하나라도 일이 생기면 모여 내일같이 생각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런 가족이 부럽기만 하다
사람사는 세상, 사람과 사람이 부딛히며 함께하는 세상이 진정 인간적이지 않는가 ?
이제 세상에 태어나게 할 신성한 의무를 망각한채 '얼마든지 낙태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주장을 과감히 하며 나아가 '우리가 애 낳는 기계나 ?' 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시대를 서글프게 한다
자신만을 생각하며 조상 나아가 낳아준 부모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타고난 신성한 숙명을 기계에 비교하다니 . .
또한 우리 또래 많은 친구들이 아직도 자신이 지고있는 짐을 해결하지 못하고 안고 함께 그냥 있는 것을 보면서 착잡하기만 하다
그리고 함께 고민하여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월현대 방향인 우리집 쪽에서 신작로로 들어서면 마주한 곳에 시계포가 나왔다
거기가 신작로 가운데 쯤 될 것이다
시계포 자리는 어렸을 때 시계를 큰 유리박스에 진열하고 시계를 수리하던 곳이었으나 문을 닫은 후에는 여러 가게가 열었다 닫었다 했다
시계포 다음으로 전기회사 출장소, 쌀가게, 자전거포, 옆집 완수네가 운영하던 생선가게가 마지막 주인으로 바뀌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완수네 아저씨가 불의의 사고로 방게 근방에서 돌아가신 뒤에는 그곳은 그냥 빈곳이 되고 . .
그 옆이 이웃집 낙희형이 운영하던 만화가게 였었는데 함께 풀빵장사를 한동안 했었다
그옆이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던 2년선배 이창희네 가게 였는데 우리집에서 가까워 많이 이용했다
거기서 공책과 연필을 샀고 큰 유리병속에 있던 설탕이 약간 뭍어있는 큰 사탕, 눈깔사탕과 진열된 샘비과자 생각이 난다
진열된 마른 오징어도 가끔 불필요한 부위를 뜯어서 먹었었다
그 옆에는 미장원이 있었으나 어릴 때 곧 문닫었다
그옆 점방이 서연석이네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였다
좀 냉랭하게 보이는 연석이 어머니가 주로 운영 하셨었지
초등학교때 연석이와 교회도 함께 다녀 잘 지냈고 연석이네 안채에서 종길이와 6학년때 잠깐 동안 같이 공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종길이가 오지않아 연석이와 함께 종길이네 집에 데리러 간적이 두번 있었다
그 시절에도 연석이는 좀 짖궂었는데 공부하다가 방 창호지문 구멍난 사이로 그것을 집어놓고 오줌 누기도 했었다
연석이네 점방 옆길이 수룡귀지 가는 길이고 그길 건너편에 부용약국이 있었다
약국은 어렸을 때 체했다고 까스활명수를 내몸이 약하다고 어머니가 원기소를 사기 위해 많이 찾았었다
약국 아저씨는 통통하고 건강한 체격에 늘 우리를 반갑게 맞이 했었는데 약국을 나중에 옴팍집 옆으로 옮겼다
수룡구지 방향으로 약간 더 들어가면 왼쪽에 방앗간이 있었고 방앗간 뒷문은 주장집 마당으로 통했다
우리도 농사를 지어 아버지를 따라서 좀 어둠컴한 그 방앗간에 가끔 갔었다
당시 부용에는 방앗간들이 많아 경쟁을 하였고 나중에 우리 나락을 사거리 방앗간에서 와서 소구루마로 실어 갔다
약국 옆에는 가끔 옛날에 과일 등을 파는 가게를 열어 추석 가까이에 감을 아버지가 한 무더기 사오신 적이 있었다
그 바로 옆이 오복이 형네 친척인 큰집에서 하던 고깃집이었다
그 옆이 양조장으로 우리는 주장집으로 불렀다
아버지가 논일을 할때 샛거리와 함께 가지고 가려고 막걸리를 주장집에서 내가 받아 왔다
지금은 그런 주전자를 찾아 볼 수 없는 큰 주전자(20 리터)를 가지고 가면 안쪽에서 가득 부어 주셨다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었고 옆에 있는 정미소 뒷문에 가보고 돈을 내면 땡그렁 소리가 나면서 열리며 꺼내 잔돈을 바꿔주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현금 박스도 생각난다
그리고 신작로에서 주장집 옆 뒷쪽으로 가는 길은 수룡귀지로 가거나 토끼산을 넘어 논에 가는 길로 내가 주로 다니던 비교적 한적한 길이었다
한편 다시 우리집 쪽에서 신작로에 들어서면 왼쪽 코너에 비교적 예쁘장한 영식엄마의 밥과 술을 파는 집이었다
그 옆은 생선가게 였었는데 앞에 판을 벌리고 꽁치와 갈치, 고등어를 진열하여 팔았고 가끔 우리도 이용했다
그 옆에 삼거리 정미소가 있었는데 송방집 방앗간이라 불렀다
나락을 맽겨놓고 찟고있는 동안 기다리면서 햇볕이 드는 안채로 가서 큰 오리들이 꽥꽥 거리거나 이상한 꽃벼슬을 한 칠면조가 있어서 구경하였었다
정미소 안쪽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며 소리나는 곳, 나락이나 쌀이 이동하는 것이 보이는 곳을 들여다 보며 나락이 찌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려 애썼었다
나중에 쌀이 나오고 또한 맵재가 나오면 가마니에 담는것이 일이었다
방앗간에서 햐이얀 쌀이 나오는 것과 밀을 가져가면 하이얀 밀가루가 되어 나오는 것이 신기하게도 여겨졌다
그옆집은 김상기씨댁 점방이었는데 아줌마와 그집 딸래미가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줘 나중에는 그곳을 많이 이용했다
그옆은 내가 초교 초기시쯤 양장점이 있었는데 문 닫은 뒤 나중에 약국이 옮겨 간 자리이고 아마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 옆집은 옴팍집이라고 길옆에 위쪽에 술, 음식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안쪽 아래채에서도 술을 들었고 아래로 움푹 들어가 있어 옴팍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옴팍집 옆에 구루마를 수리하는 철공소가 있었다
지나 다니면서 나하고 별로 관계없는 곳이라 관심이 없었는데너무 어려서 일이라 다들 기억이 없을것이라 생각한다
그 옆에 가게가 있었는데 위치가 안좋아서 그랬는지 나중에 닫은 것 같다
그 옆집은 어릴때 방앗간을 했었는데 일찌갈치 고만 두었다
조항래라고 이년 후배가 살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완병네집 내려가는 골목건너서 코너에 부용사진관이 있었지
그옆이 짜장면집으로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옆이 미미이발관, 아버지도 나도 깍으러 여러번 갔었지
잘하면 명숙이도 만나고 . .
그옆이 주재영네 기름집 . .
그옆이 소방서차 대기장
그옆이 파출소 . .
영호가 방위로 근무했던 곳
소방차고와 파출소는 원래 없었는데 나중에 지었고 건물이 없었을 때 순회공연 약장수가 가끔 그 밭에 가설 무대를 차려놓고 동네방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장화홍련전, 흥부전, 심청전 등 우리 고전을 그럴듯하게 공영하고 약을 팔던 곳이다
그때 생각하기에 저게 정식으로 약회사가 생긴다던데 하며 궁금했고 종고교 다닐때 그게 종근당이나 될까 하고 생각한적이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 .
다시 신작로 시계포집으로 불리던 우리집으로 가는 골목 바로 앞쪽의 오른쪽에는 원화당약국이 있었다
거기에 살던 점잖고 키가 약간 작았던 할아버지와 초교 일년 선배가 살은 것으로 생각난다
그옆집은 부용이발소로 보조로 이발하던 사람이 이어 받으며 계속되었는데 어릴 때 키가 작아서 내가 이발소 의자 팔 괴는 손잡이 양쪽에 판대기를 얹혀놓고 머리깍은 기억이 난다
그 옆에는 창고 같은 건물에 초교동창 정영수 아버지가 하던 쌀가게가 있었다
그옆은 전에 시장이었던 같은 집들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성결교회로 가는 길이 생겼다
그쪽끝 코너에 소주를 벽에 층층으로 진열해 놓고 팔았던 소주, 정종을 팔아서 그곳에도 심부름으로 정종 대도병을 사가지고 온 기억이 있다
삼거리의 학교방향 삼각지에는 현애네 집이 있었고 길쪽 가게는 세군데를 했었는데 쇠주집 쪽으로 가상에 미장원이 있었다
동네 아가씨, 아줌마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을 지나 다니면서 보아왔다
그옆에 가게가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으며
그옆집이 현애 아버지가 하시던 철물점이었다
가끔 못, 철사 등을 사러 심부름 갔었다
현애 아버지와 함께 우리 어머니와 비교적 가까이 지내시던 현애엄마, 키크고 말발이 세던 보석이형, 고교때 걷는 모습이 믿음직하게 보이던 현석이 집안채에도 초가집이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가본적이 있어 기억이 난다
거기서 학교 쪽으로 아버지와 형제들 특히 2년선배 운회형네가 한때 물집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자전거포를 하기도 했었다
그 옆집이 삼묵이네 집이다
황은묵 선생, 재묵이형 등이 있었다
그 다음집은 잘 생각이 안난다
길에 면한 문이 있던 집이었는데 그때 동동주를 팔아서 가끔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술을 가질러 가본적이 있다
그 다음이 병원 재희네 병원과 집이 있었다
초기에는 골목길 앞에 간판이 있었고 대기실, 진료실이 있었는데 나중에 뒷쪽 반월리 가는 길쪽으로 새집을 지어 옮겼다
낫으로 내 발목 위를 베어 피를 많이 흘리면서 재희 아버지에게 치료 받은 것이 엊그제 같다
한편 다시 우리집 쪽에서 신작로로 올라가면 오른쪽 코너에 경성고무신 이란 간판과 함께 신발을 진열하던 고무신가게가 생각난다
우리집쪽 길에 살던 키가 크던 할아버지가 하셨던 가게이다
신발가게와 함께 담배라는 작은 광고판을 언제나 볼 수 있었으며 가게는 집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고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과 함께 등잔불을 밝히기 위한 대도병에 기름을 받아 오는 것이 내 임무였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담배 애호가로 상황이 나을 때는 진달래 갑담배로 안 좋을 때는 풍년초 봉초 심부름을 했었는데 봉초를 까서 깨끗한 창호지 같은 곳에 말아 피우다가 때로는 신문지로 더 안 좋을 때는 호박잎으로 말아서 피셨다
지금 살아 계셨다면 건강에 안 좋긴 하지만 최고로 비싼 좋은 담배를 한보로 사드리고 싶은데 안 계시네요
이 글을 쓰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 .
그옆집은 우리동네 오복이네 고깃집이 있었다
그 옆집은 2년 선배 택수네 집으로 계샤쓰와 털실을 취급하던 곳이었다
당시 지나 가면서 유리창 안으로 편물기계를 놓고 뭔가를 짜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도 계샤쓰 윗도리, 장갑, 양말 등을 누나가 짜면서 직접 계실을 누나가 사오신 것으로 생각된다
부용 신작로에도 양장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영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옆이 비단가게 포목점이었다
가게 안에 포목을 세로로 나란히 세워놓고 비단집 단정하고 예쁘장한 아주머니가 장사하셨다
서정림 이란 성결교회 집사와 남동생이 성결교회에 장로로서 주된 역할을 하고 나중에 땅을 팔아 교회를 새로 짓는데 앞장서 온 분이 계셨었다
그옆 골목 넘어 세탁소가 있었다
당시 전기도 들어와 있었지만 전기료가 아까워 난로위에 다리미를 올려 놓았다가 뜨거워진 것으로 물을 뿌리며 칙 소리가 나면서 다리미로 옷을 대린 것이 생각이 난다
그 옆집은 길에 약간 비스듬하게 면한 술집이었었다
그옆집은 잘 기억이 안나고
그 옆집이 뒷쪽에 큰 기와집으로 남쪽 코너에 문이 있었고 동창 임갑순이 한쪽에 살던 집이다
그옆 옛 성결교회 사이 골목길은 최종화네가 사는 나중에 전기회사 간판마져 옮겨 단 큰 기와집이 있었다
건너편 삼묵이네집 앞쪽으로 옛 성결교회가 있었고 나도 어머니 따라 부흥회에 몇번 넓지않은 교회에 간적이 있다
그옆이 황호야네 자전거포이다
지나 다니면서 호야 아버지가 자전거를 수리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나도 가끔 수룡구지 매형 자전거에 바람 넣으러 간적이 있다
그때가 신작로가 한참 번성하던 시기로 생각된다
기차역이 있었고 큰 트럭은 있었으나 버스, 택시 등이 부용에서는 볼 수 없었다
주된 신작로조차 비가 오면 구루마나 트럭 바퀴 자국으로 깊게 두줄이 나고 군데군데 물구덩이가 흙탕물로 차있고 비온 다음에는 질턱하여 고무신과 바지가랭이를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상자리로 조심스럽게 피하여 다니고 깨금짚거나 폴짝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신작로가 더 번영했을지도 모른다
황산이나 공덕에서도 물건사러 부용으로 왔고 백구 분교가 없었으며 교회를 학동리에서도 용지 죽신리, 송산리에서도 왔었으니까
저녁때가 되면 역전에서 부터 옴팍집을 거쳐 영식엄마가 운영하는 술과 음식을 파는 집들이 항시 떠들썩 했었다
신작로에는 또한 가게들이 많았다
우리집 골목 바로 앞에 시계를 판매 진열하고 수리하는 시계포
시계포 자리는 시계포가 없어지고 자전거 수리, 쌀집, 그리고 완수네 아저씨가 하던 생선가게가 있었다
그 옆에는 중학교 무렵 옆집 낙희형이 하던 만화방이 꽤 오래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작으마한 이창희 형네 아버지가 점방을 하고 창의형도 가끔 거들었다
창희형네
골목 코너에 왼쪽은 영식엄마가 하는 밥집에 가끔 달걀 팔러 갔었다 , 오른쪽에는 담배 소금집으로 아버지 담배 심부름과 등잔에 넣을 기름사러 대도병을 들고 갔었지
옛날에는 거기에 경성고무신집이 있었는데 문을 닫고 담배, 기름, 소금만 발았다
그 앞에 학교방향으로 원화당약방, 원화당 약방에는 1년 선배가 살았었다
건너편에 비단집, 비단집은 어머니와 아들이 성결교회에 열심하여 교회 옮기는데 앞장 섰었다
그 앞 삼거리 이발소에서 어릴때부터 내머리를 많이 깍았었다
삼거리 현석이네 쪽 코너에 가게가 셋 있었는데 오른쪽엔 현석이네 철물점, 중간은 미장원, 왼쪽은 생각이 안난다
삼거리 비단집 쪽 건너편 세탁소가 있었으며 스팀다리미로 키작은 아저씨가 옷을 다리던 모습이 선하다
정미소가 여러곳 있어 골라서 방아를 찧었는데 영단, 주장집 앞, 수룡귀지 가는 신작로길, 수룡귀지길로 들어서 왼쪽, 훈식이네, 그 앞집 권오혁이네. 사거리 방앗간 7군데나 되었다
점방도 역전 길에서 좁아지는 곳 양쪽 두곳, 주장집 앞, 수룡구지 가는 길 삼거리 코너에 연석이네, 그 건너편, 우리집쪽 골목앞 1년선배 이창희네, 학교근방 삼거리 큰애기 점방, 조자빙네, 학교앞 소사아저씨네, 그앞집 8군데 있었다
이발소는 미미이발관, 삼거리, 큰애기 점방네 앞 그리고 없어진 곳 등이 있었다
기차역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서 한잔 걸치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2차 3차를 하여 이상으로 신작로의 술집들이 한창인 때가 있었다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바깥으로 나돌며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간이 나빠지거나 간디스토마 등 작은 병이 걸려도 원인 파악과 치료할 수 있는 60년대 의술이 빈약했기 때문에 일찍 돌아 가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행복하던 시골 가정들도 어른 한사람이 돌아 가시면 그집은 집안이 풍지박산이 났었고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면서 살아 왔었다
옆집 영식이네 아버지, 종태, 오진, 창순, 방앗간 훈식이네, 외삼촌, 매형 그리고 우리 아버지 . .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내가 고등학교 줄업한 해에 돌아 가셨는데 오래전에 외삼촌이 7남매 그리고 매형도 어리디 어린 7남매를 남겨놓고 먼저 가셨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뒤 나중에 만난 권오진 여동생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 공장에 취직하러 떠나고 남동생 오주는 나중에 원대 야간을 다니면서 돈 없어 학교를 책 없이 다녔다
한 가정의 정신적 경제적 기둥이자 가족을 먹여 살리던 어른이 돌아 가셨으니 일단 가진 풍부한 재산이나 하던 일거리가 있는 집을 제외하고는 먹고 살일이 막막했던 집이 대부분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그때 옆에 항상 있어주어 사랑해주고 의지하던 기둥이 별안간 사라졌으니 이제 낳아놓은 여러명의 자식 틈바구니에서 자식들과 부데끼면서 살아야 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과 자신만의 삶을 포기하며 정욕을 억누르고 극히 어려운 상황을 살아 왔으리라 생각한다
그걸 한편으로 희생과 인내라고 지금 생각한다
그뒤로 정부의 둘만 낳자는 산아정책 시행에 따라 가족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우리 세대가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으며 나 또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즉 자연의 섭리를 정부정책이 의술을 이용하여 상황을 변경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후유증을 이 시대가 겪고 있다고 보지만 . .
우리의 어린시절에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었다고 하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넷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ㅎㅎ. .
거기에 도시화와 함께 아파트 문화로 점입하여 점점 이웃과의 벽이 두툼하게 되고 핵 가족화가 진행되어 아파트 옆집 사람도 전혀 모른채 지내게 되었다
이제 둘만 낳아 잘 기른 우리 세대들은 독립하여 나가버린 자식들로 인하여 대부분 둘만 남게되고 또는 한사람이 먼저 간 사람은 더욱 더 혼자만의 공간에서 외로움을 달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조금 있으면 어짜피 다들 혼자가 되겠지만 . .
우리들이 어렸을때 삼대가 같이 지낼 수 있고 어른 대접을 받으며 또 늘 손자가 크는 것을 보면서 살았을텐데 이제 자식 며느리의 식사대접을 받지 못하고 둘이서 혹은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기둥이 없어짐에 따라 단단한 연줄로 이어진 줄이 끊어지고 친척간 이웃간에도 멀어지고 또 찾아갈 명분이 없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도 장인, 장모가 돌아가신 후 처가에 가지 않고 있으며 갈 명분도 사라졌다
친구들과 이야기 중에 10남매가 어른되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들으며 부러워 했었는데 그중 하나라도 일이 생기면 모여 내일같이 생각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런 가족이 부럽기만 하다
사람사는 세상, 사람과 사람이 부딛히며 함께하는 세상이 진정 인간적이지 않는가 ?
이제 세상에 태어나게 할 신성한 의무를 망각한채 '얼마든지 낙태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주장을 과감히 하며 나아가 '우리가 애 낳는 기계나 ?' 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시대를 서글프게 한다
자신만을 생각하며 조상 나아가 낳아준 부모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타고난 신성한 숙명을 기계에 비교하다니 . .
또한 우리 또래 많은 친구들이 아직도 자신이 지고있는 짐을 해결하지 못하고 안고 함께 그냥 있는 것을 보면서 착잡하기만 하다
그리고 함께 고민하여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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