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문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2-20 07:41 조회 3,121 댓글 0본문
군산에 사는 직원모친 장례식의 상여 나갈때 참여했었다
꽃상여를 따라 가면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상여꾼이 앞에서 '땡그렁 ~' 종소리와 함께 처절한 가락의 외치는 낭송에 언젠가는 나도 저 예쁘게 꾸민 저 상여위에 눕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별안간 들어서 . . .
그런지가 어언 삼십 여년이 흘러갔다
옛날의 장사지내는 모습의 장례문화가 많이 변하여 이제는 상여로 운구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집안에 천막을 친 상가에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양상은 장례식장이 생기는 바람에 아예 없어져 버렸고 만사를 앞세운 상여행렬은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때는 좁은 집이던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던 간에 일단 돌아가신 분을 집에 모시고 마당에 천막을 치고 상가를 만들었다
신작로가에 마당이 없는 집은 길 한쪽에 천막을 치고 왕래하는데 큰 방해가 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허용했었다
전기가 없는 집은 이웃집에서 연결하여 상가집을 환하게 밝혔다
대개 마루 한쪽에 영정사진과 상을 차려놓고 상주는 한쪽 팔을 끼지않은 상복을 입고 문상 온 사람을 맞이 하였으며 입관 후 상복 양쪽팔을 끼우고 제대로 상복을 입었었다
상복은 삼베로 짠 천으로 만들어 입고 또 삼베로 만든 건을 머리에 썼으며 허리와 머리에 짚으로 꼰 밧줄 같은 것을 혁대같이 감고 머리 건에 동여메고 지팡이를 짚었다
장사를 지내는 것은 시골 동네로서 큰일을 치루는 일로 온동네가 떠들썩했고 많은 사람들이 내일같이 참여했었다
상부상조의 정신이 시골 부락에서 빛을 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천막아래 마당에 멍석을 깔고 문상객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한쪽에서는 작은 깍지 잔으로 윷놀이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화투판과 함께 막걸리판이 벌어졌다
일찌기 막걸리에 취해서 술주정하거나 인사불성이 되는 사람도 있었으며
상가집에 들어온 조의금을 상주한테 빌려 밤새도록 화투를 치는 사람도 많았다
천막 옆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손을 쪼이며 둘러앉아 오랫만에 만난 이웃과 정담을 나누고 연신 장작개비를 가져다 모닥불을 지펴 살렸다
아마 그래야 영혼을 위로하고 상가를 지키는 상주들을 외롭지 않게 위로하고 덜 슬프게 하지않나 생각된다
장인 장례식때 큰처남이 목사님이라 경건하게 치룬다고 초상마당에서 화투나 술판을 못하게 하여 바둑이나 장기를 밤새도록 두었는데 그것을 본 이웃 아저씨 하는 말이
세상에 이렇게 장례를 치루는 상가는 처음 본다고 몹쓸 짓이라고 혹평을 했다
장례를 치루는 집은 밤새도록 새벽까지 떠들썩했고 날이 밝으면서 조금 조용해졌다
그렇게 하여 이틀을 지난 후 한쪽에서는 상여를 준비하고 간단한 발인 제사를 지냈다
상여가 나갈 때쯤 되면 동네의 큰일들을 일일히 간섭하는 것을 전문으로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어른의 지휘아래 그동안 초상마당을 지켰던 사람을 위주로 젊은이를 뽑아 상여를 멜 사람을 정한다
마지막 가는 길을 잘 보내드리고 싶었는지 모두 종이로 만든 조화이긴 하지만 잘 치장된 예쁜 꽃상여가 대부분이었다
아름다운 꽃상여를 보면서 '나도 저세상 갈 때 저런 예쁜 꽃상여를 타고 갔으면 . . '하고 이웃집 할머니가 혼잣말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다
상여가 출발하면 제일 앞에 상주가 작은 의자같은 곳에 고인의 영정사진을 보듬고 앞서간다
그뒤를 한자로 '雲', '亞' 자 같은 한자를 B5 용지 크기에 쓴것을 대나무 끝에 꼽고 가는 것과 비단에 한자로 문장을 쓴 큰 휘장 같은 만사를 대나무 높이 매달고 가는데
그 길다란 만사행렬이 동네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
행렬의 길이와 깃발 대나무의 숫자는 돌아가신 분의 집안 권세와 부에 비례하였던 것 같았으며 상여와 함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분위기의 기다란 행렬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뒤에는 상여 앞에서 요령잡이가 상여쪽을 향하여 '땡그렁 땡그렁 ~ ♪' 종을 치면서 아주 슬픔에 찬 곡조로 선창을 한다
'이제가면 언제 오나 ~ ♩' 하고 아주 처절하게 슬픈 내용을 슬픈 가락과 함께 낭송을 하면
'어 ~ 헤야' 하고 상여를 멘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은 함께 박자를 맞추어 후창을 했다
요령잡이의 고인을 보내는 슬픈 가락과 함께 보내고 싶지 않으나 할 수 없이 보내야만 하는 내용의 낭송이 참여하는 이들의 심금을 파고들어 구슬픈 울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상여행렬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된다
상여를 메는 사람들은 한쪽에 약 대여섯명 양쪽 합하여 10~12명 정도 주로 장정들과 어른들이 담당했다
상여 뒤를 상주를 비롯한 유족들이 따라 가면서 계속 고인을 잃은 슬픈 울음을 토해 냈고 동네사람들도 따라갔었다
일반인들은 시골에서 좀처럼 그런 구경도 쉽지 않았기에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상여는 출발하여 계속 쭈욱 가는게 아니라 다리 등 장애물이 있으면 젊은 상여꾼들은 거기에서 지연작전을 쓰기도 했었다
그럴때 마다 상주며 친척들이 상여의 앞부분의 새끼로 된 곳에 연신 돈을 찔러 놓았다
상여행렬은 중간에 적당한 곳에 쉬는 곳이 한차례 이상 있었다
쉬는 곳에서 노제를 지내고 상여꾼들한테는 막걸리 등 대접을 하였다
상여를 메고가는 사람들은 약간 험한 경사진 산이나 언덕 위에도 거뜬히 올라가기도 하여 장지에 도착한다
다만 어릴때 추억은 그러한 장례문화를 늘상 옆에서 보아 왔으며 때로는 만사행렬의 깃발 대나무 들고가는 일이었다
장지에 도착하면 상여등 대부분의 상여물품은 한쪽에서 태우는데 만사를 맸던 대나무는 들고 간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 있게 하여 그 대나무를 얻으려고 하는게 우리 목적이었다
귀했던 장대 대나무는 집으로 가져와 껍질 부위를 얇게 깍아서 연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 뒤의 장례의식은 현재 모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나 또 하나의 변화는 납골당과 공동묘지 같은 장묘형태이다
납골당에 다녀 온 느낌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릴때 집안의 어른들이 너무 쉽게 많이 돌아가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외삼촌, 매형, 아버지 또한 이웃 영준아버지, 종태아버지 등등 . .
한창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며 줄줄이 딸린 식구들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에 . .
물론 의술이 발달 하기전이라 병명이나 치료방법이 확립되지 않을 때이긴 하지만
집안의 기둥인 가장이 무너지면서 그로 인하여 가정이 풍지박산 되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였다
지금 내 나이면 그때 같았으면 동네 경로당 제일 아랫묵을 차지하고도 남았을 시절이었을 것 이리라 생각한다
또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나 호랑이도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다
뭔가는 후세들이 볼 때 그냥 왔다가 가는 것 보다 긍정적인 어떤 것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을 까 하는 생각에 이러한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한 것 같다
꽃상여를 따라 가면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상여꾼이 앞에서 '땡그렁 ~' 종소리와 함께 처절한 가락의 외치는 낭송에 언젠가는 나도 저 예쁘게 꾸민 저 상여위에 눕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별안간 들어서 . . .
그런지가 어언 삼십 여년이 흘러갔다
옛날의 장사지내는 모습의 장례문화가 많이 변하여 이제는 상여로 운구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집안에 천막을 친 상가에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양상은 장례식장이 생기는 바람에 아예 없어져 버렸고 만사를 앞세운 상여행렬은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때는 좁은 집이던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던 간에 일단 돌아가신 분을 집에 모시고 마당에 천막을 치고 상가를 만들었다
신작로가에 마당이 없는 집은 길 한쪽에 천막을 치고 왕래하는데 큰 방해가 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허용했었다
전기가 없는 집은 이웃집에서 연결하여 상가집을 환하게 밝혔다
대개 마루 한쪽에 영정사진과 상을 차려놓고 상주는 한쪽 팔을 끼지않은 상복을 입고 문상 온 사람을 맞이 하였으며 입관 후 상복 양쪽팔을 끼우고 제대로 상복을 입었었다
상복은 삼베로 짠 천으로 만들어 입고 또 삼베로 만든 건을 머리에 썼으며 허리와 머리에 짚으로 꼰 밧줄 같은 것을 혁대같이 감고 머리 건에 동여메고 지팡이를 짚었다
장사를 지내는 것은 시골 동네로서 큰일을 치루는 일로 온동네가 떠들썩했고 많은 사람들이 내일같이 참여했었다
상부상조의 정신이 시골 부락에서 빛을 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천막아래 마당에 멍석을 깔고 문상객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한쪽에서는 작은 깍지 잔으로 윷놀이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화투판과 함께 막걸리판이 벌어졌다
일찌기 막걸리에 취해서 술주정하거나 인사불성이 되는 사람도 있었으며
상가집에 들어온 조의금을 상주한테 빌려 밤새도록 화투를 치는 사람도 많았다
천막 옆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손을 쪼이며 둘러앉아 오랫만에 만난 이웃과 정담을 나누고 연신 장작개비를 가져다 모닥불을 지펴 살렸다
아마 그래야 영혼을 위로하고 상가를 지키는 상주들을 외롭지 않게 위로하고 덜 슬프게 하지않나 생각된다
장인 장례식때 큰처남이 목사님이라 경건하게 치룬다고 초상마당에서 화투나 술판을 못하게 하여 바둑이나 장기를 밤새도록 두었는데 그것을 본 이웃 아저씨 하는 말이
세상에 이렇게 장례를 치루는 상가는 처음 본다고 몹쓸 짓이라고 혹평을 했다
장례를 치루는 집은 밤새도록 새벽까지 떠들썩했고 날이 밝으면서 조금 조용해졌다
그렇게 하여 이틀을 지난 후 한쪽에서는 상여를 준비하고 간단한 발인 제사를 지냈다
상여가 나갈 때쯤 되면 동네의 큰일들을 일일히 간섭하는 것을 전문으로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어른의 지휘아래 그동안 초상마당을 지켰던 사람을 위주로 젊은이를 뽑아 상여를 멜 사람을 정한다
마지막 가는 길을 잘 보내드리고 싶었는지 모두 종이로 만든 조화이긴 하지만 잘 치장된 예쁜 꽃상여가 대부분이었다
아름다운 꽃상여를 보면서 '나도 저세상 갈 때 저런 예쁜 꽃상여를 타고 갔으면 . . '하고 이웃집 할머니가 혼잣말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다
상여가 출발하면 제일 앞에 상주가 작은 의자같은 곳에 고인의 영정사진을 보듬고 앞서간다
그뒤를 한자로 '雲', '亞' 자 같은 한자를 B5 용지 크기에 쓴것을 대나무 끝에 꼽고 가는 것과 비단에 한자로 문장을 쓴 큰 휘장 같은 만사를 대나무 높이 매달고 가는데
그 길다란 만사행렬이 동네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
행렬의 길이와 깃발 대나무의 숫자는 돌아가신 분의 집안 권세와 부에 비례하였던 것 같았으며 상여와 함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분위기의 기다란 행렬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뒤에는 상여 앞에서 요령잡이가 상여쪽을 향하여 '땡그렁 땡그렁 ~ ♪' 종을 치면서 아주 슬픔에 찬 곡조로 선창을 한다
'이제가면 언제 오나 ~ ♩' 하고 아주 처절하게 슬픈 내용을 슬픈 가락과 함께 낭송을 하면
'어 ~ 헤야' 하고 상여를 멘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은 함께 박자를 맞추어 후창을 했다
요령잡이의 고인을 보내는 슬픈 가락과 함께 보내고 싶지 않으나 할 수 없이 보내야만 하는 내용의 낭송이 참여하는 이들의 심금을 파고들어 구슬픈 울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상여행렬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된다
상여를 메는 사람들은 한쪽에 약 대여섯명 양쪽 합하여 10~12명 정도 주로 장정들과 어른들이 담당했다
상여 뒤를 상주를 비롯한 유족들이 따라 가면서 계속 고인을 잃은 슬픈 울음을 토해 냈고 동네사람들도 따라갔었다
일반인들은 시골에서 좀처럼 그런 구경도 쉽지 않았기에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상여는 출발하여 계속 쭈욱 가는게 아니라 다리 등 장애물이 있으면 젊은 상여꾼들은 거기에서 지연작전을 쓰기도 했었다
그럴때 마다 상주며 친척들이 상여의 앞부분의 새끼로 된 곳에 연신 돈을 찔러 놓았다
상여행렬은 중간에 적당한 곳에 쉬는 곳이 한차례 이상 있었다
쉬는 곳에서 노제를 지내고 상여꾼들한테는 막걸리 등 대접을 하였다
상여를 메고가는 사람들은 약간 험한 경사진 산이나 언덕 위에도 거뜬히 올라가기도 하여 장지에 도착한다
다만 어릴때 추억은 그러한 장례문화를 늘상 옆에서 보아 왔으며 때로는 만사행렬의 깃발 대나무 들고가는 일이었다
장지에 도착하면 상여등 대부분의 상여물품은 한쪽에서 태우는데 만사를 맸던 대나무는 들고 간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 있게 하여 그 대나무를 얻으려고 하는게 우리 목적이었다
귀했던 장대 대나무는 집으로 가져와 껍질 부위를 얇게 깍아서 연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 뒤의 장례의식은 현재 모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나 또 하나의 변화는 납골당과 공동묘지 같은 장묘형태이다
납골당에 다녀 온 느낌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릴때 집안의 어른들이 너무 쉽게 많이 돌아가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외삼촌, 매형, 아버지 또한 이웃 영준아버지, 종태아버지 등등 . .
한창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며 줄줄이 딸린 식구들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에 . .
물론 의술이 발달 하기전이라 병명이나 치료방법이 확립되지 않을 때이긴 하지만
집안의 기둥인 가장이 무너지면서 그로 인하여 가정이 풍지박산 되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였다
지금 내 나이면 그때 같았으면 동네 경로당 제일 아랫묵을 차지하고도 남았을 시절이었을 것 이리라 생각한다
또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나 호랑이도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다
뭔가는 후세들이 볼 때 그냥 왔다가 가는 것 보다 긍정적인 어떤 것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을 까 하는 생각에 이러한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한 것 같다
관련링크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