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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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9-13 18:38 조회 2,208 댓글 0본문
태풍이 지나가며 이곳에도 계속 비를 뿌립니다
어릴적 모내기철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농부들은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엇을 것입니다
아니 안도의 한숨이겠지요
논에 물이 가득하면 그것은 마치 장거리여행 자동차에 기름이 저절로 가득 채워진 것 처럼 . .
모판을 만들땐 물이 조금만 있어도 되지만 모내기 때는 논바닥이 바싹 말라 있으면 하늘을 쳐다보며 걱정 한 그득,
농민들의 속은 타들어 갈 수 밖에 . .
오죽했으면 그 옛날에 기우제를 지냈었을까!.
그 가운데서도 모는 점점 자라가고 있었으니 . .
대체로 6월 중순쯤 모내기를 마쳤었는데 비가 안오면 7월 중순까지 기다려 다른 논에는 한참 벼가 커가고 있을때라도 모는 심어야 하였지요
지금은 파이프를 박아 펌프로 물을 퍼내 논에 채우면 간단하게 해결되는데 . .
우리 목과동 작은 논배미는 부용방죽의 용길네집쪽 수문을 열면 수로에서 물을 퍼 올려야 하는데 나도 아버지를 도와 한몫을 하려고 물자세에 올라 발힘으로 힘을 줘 봤었지요
체구가 작아 물래방아처럼 생긴 물자세에 발힘이 제대로 가하지 않아 별 도움을 주지 못했었지만.
소가 갈아엎어 놓은 논에 물이 차며는 괭이와 쇠스랑, 써래(고무래 같은 것)를 사용하여 모를 심을 수 있게 고루 평평하게 만들었었는데
논에 있던 흙은 수면아래로 들어가고 몇개의 나락 그루터기만 남아 방죽처럼 보이기도 하였었다
거기서 밤새 개골개골 개구리 합창들로 요란스러웠던 기억들이 새록 새록 하다
10 cm 정도로 모가 크면 모판에서 모를 찌어 한 다발씩 짚으로 묶어 지게에 지고 논 가운데 여기저기에 던져 놓았고
작은 논배미는 주로 호락질로 모를 심었다
호락질은 혼자서 논이나 밭을 가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식구들 끼리만 모내기를 하기에 나도 한몫을 할수 밖에
처음에는 못줄만 잡아 주다가 점점 못줄과 모내기를 같이 하였었다
모심기할 때 힘이 드는것은 모를 심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이며 어린 나이에 나도 허리가 많이 아팠었다
너무 많이 아파서 어린 투정으로 모를 심다가 중간에 나와버리기도 하였지만 그 몫을 대신 다른 식구가 담당하여야 하기 때문에 바로 꾸지람으로 돌아왔다
또한 물논은 발이 진흙속에 쑥쑥 빠져 발을 떼기 힘들고 서있거나 이동하는데 중심을 가누기가 어려운게 문제였으며 거기에 물에 있는 그무락지가 종아리를 물어 피 빨아먹는 것을 주기적으로 떼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런 중노동 가운데 기다려지는 것은 바로 샛거리와 점심식사였다
샛거리는 넝쿨로 짠 동그랗게 큰 광주리였었으나 나중에 다라이로 바뀌어 머리에 이고 왔었는데 나중에 리어카로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게 얼마나 기다려 지는지 모내기 안해본 사람은 모를것이다
나중에 여러명이 단체로 모를 심는 조합을 만들어 운용하였었지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짧은시간에 모내기를 끝내고 바로 다른 논으로 바로 이동하여 모심기를 반복하였었다
모심기 조합은 약 20명 정도 그중 남자는 모를 지게로 날라 물논 안으로 골고루 던져 심을때 모 부족함이 없게하고 또한 못줄잡기를 하였으며 대부분은 여자들이 모를 심었다
조합에서는 샛거리가 따로 준비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이 만든 밀가루 빵, 옥수수 같은 것으로 해결해야 했었다
부용 벌판은 조합모의 덕분으로 넓은 들이 점점 연녹색으로 점차 변해가고 약 20일 정도사이면 물을 대지 못한 논이나 모가 부족한 일부만 남지만 그마저도 곧 연초록색으로 변하게 되었다
모를 심을때 논이 구불구불 거리거나 높낮이가 다른 논은 못줄잡기 등 모심는데 원할치 못했었는데 1970년대 전부 여섯마지기씩 사각형으로 만들고 수로와 농기구가 통과할 수 있게 작은 농로를 만드는 경지정리 작업이 시행되었었다
물론 우리와 비교도 안되겠지만 중국의 산자락에 있는 촘촘한 층계식 논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경지정리를 하는 바람에 목과동 철길넘어 들판 한가운데 살던 몇가구가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게 한연구, 윤인숙이네가 아니었는가
어릴때 해마다 어김없는 행사로 치루던 모내기가 그만 . .
이앙기가 대신하게 되면서 농업의 기계화가 촉진되어 모내기 행사는 우리들의 추억속으로 살아져야 되지 않았겠는가
흑흑 . .
어릴적 모내기철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농부들은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엇을 것입니다
아니 안도의 한숨이겠지요
논에 물이 가득하면 그것은 마치 장거리여행 자동차에 기름이 저절로 가득 채워진 것 처럼 . .
모판을 만들땐 물이 조금만 있어도 되지만 모내기 때는 논바닥이 바싹 말라 있으면 하늘을 쳐다보며 걱정 한 그득,
농민들의 속은 타들어 갈 수 밖에 . .
오죽했으면 그 옛날에 기우제를 지냈었을까!.
그 가운데서도 모는 점점 자라가고 있었으니 . .
대체로 6월 중순쯤 모내기를 마쳤었는데 비가 안오면 7월 중순까지 기다려 다른 논에는 한참 벼가 커가고 있을때라도 모는 심어야 하였지요
지금은 파이프를 박아 펌프로 물을 퍼내 논에 채우면 간단하게 해결되는데 . .
우리 목과동 작은 논배미는 부용방죽의 용길네집쪽 수문을 열면 수로에서 물을 퍼 올려야 하는데 나도 아버지를 도와 한몫을 하려고 물자세에 올라 발힘으로 힘을 줘 봤었지요
체구가 작아 물래방아처럼 생긴 물자세에 발힘이 제대로 가하지 않아 별 도움을 주지 못했었지만.
소가 갈아엎어 놓은 논에 물이 차며는 괭이와 쇠스랑, 써래(고무래 같은 것)를 사용하여 모를 심을 수 있게 고루 평평하게 만들었었는데
논에 있던 흙은 수면아래로 들어가고 몇개의 나락 그루터기만 남아 방죽처럼 보이기도 하였었다
거기서 밤새 개골개골 개구리 합창들로 요란스러웠던 기억들이 새록 새록 하다
10 cm 정도로 모가 크면 모판에서 모를 찌어 한 다발씩 짚으로 묶어 지게에 지고 논 가운데 여기저기에 던져 놓았고
작은 논배미는 주로 호락질로 모를 심었다
호락질은 혼자서 논이나 밭을 가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식구들 끼리만 모내기를 하기에 나도 한몫을 할수 밖에
처음에는 못줄만 잡아 주다가 점점 못줄과 모내기를 같이 하였었다
모심기할 때 힘이 드는것은 모를 심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이며 어린 나이에 나도 허리가 많이 아팠었다
너무 많이 아파서 어린 투정으로 모를 심다가 중간에 나와버리기도 하였지만 그 몫을 대신 다른 식구가 담당하여야 하기 때문에 바로 꾸지람으로 돌아왔다
또한 물논은 발이 진흙속에 쑥쑥 빠져 발을 떼기 힘들고 서있거나 이동하는데 중심을 가누기가 어려운게 문제였으며 거기에 물에 있는 그무락지가 종아리를 물어 피 빨아먹는 것을 주기적으로 떼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런 중노동 가운데 기다려지는 것은 바로 샛거리와 점심식사였다
샛거리는 넝쿨로 짠 동그랗게 큰 광주리였었으나 나중에 다라이로 바뀌어 머리에 이고 왔었는데 나중에 리어카로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게 얼마나 기다려 지는지 모내기 안해본 사람은 모를것이다
나중에 여러명이 단체로 모를 심는 조합을 만들어 운용하였었지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짧은시간에 모내기를 끝내고 바로 다른 논으로 바로 이동하여 모심기를 반복하였었다
모심기 조합은 약 20명 정도 그중 남자는 모를 지게로 날라 물논 안으로 골고루 던져 심을때 모 부족함이 없게하고 또한 못줄잡기를 하였으며 대부분은 여자들이 모를 심었다
조합에서는 샛거리가 따로 준비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이 만든 밀가루 빵, 옥수수 같은 것으로 해결해야 했었다
부용 벌판은 조합모의 덕분으로 넓은 들이 점점 연녹색으로 점차 변해가고 약 20일 정도사이면 물을 대지 못한 논이나 모가 부족한 일부만 남지만 그마저도 곧 연초록색으로 변하게 되었다
모를 심을때 논이 구불구불 거리거나 높낮이가 다른 논은 못줄잡기 등 모심는데 원할치 못했었는데 1970년대 전부 여섯마지기씩 사각형으로 만들고 수로와 농기구가 통과할 수 있게 작은 농로를 만드는 경지정리 작업이 시행되었었다
물론 우리와 비교도 안되겠지만 중국의 산자락에 있는 촘촘한 층계식 논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경지정리를 하는 바람에 목과동 철길넘어 들판 한가운데 살던 몇가구가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게 한연구, 윤인숙이네가 아니었는가
어릴때 해마다 어김없는 행사로 치루던 모내기가 그만 . .
이앙기가 대신하게 되면서 농업의 기계화가 촉진되어 모내기 행사는 우리들의 추억속으로 살아져야 되지 않았겠는가
흑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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