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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인과 한국시인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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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139회 작성일 22-01-2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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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변화시키는“말” 한국에서 만난 이바라키 노리코 -> 하부에 원본 있음

2021년 12월 28일 20시 29분

자기의 감수성 정도는
자기가 지켜라
바보야

이바라기 노리꼬의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

삶에 헤매일 때. 자신감이 없을 때. 큰 어떤 것에 의하여 흘려 없애져 버릴 것 같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 시인의 말은 한국에서도 사랑을 받고 퍼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
(서울 지국 디렉터 나가노 케이고)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이바라키 노리코의 말

11월 중순.

한국의 관광명소, 서울타워의 기슭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의 낭독회가 진행 되었습니다.
올해로 타계한 뒤 15년이 된 그녀의 시는 일본에서 세대를 넘어 사랑받아 왔습니다.
사실 이바라키의 시는 몇년 전부터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날도 20대부터 30대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선택하여 낭독하고,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바라키 노리코의 낭독회(서울) – 사진 02
.
 한국에서 출판된 이바라키 노리코의 시집 – 사진 03
고교 교사 30대 여성
「『내가 제일 예뻤었을 때』는, 우리 할머니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할머니에게도 “예뻤을 때”가 있었다라고,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30대 여성은 '湖水'라는 시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이 시의 『인간의 매력이란 아마 그 호수 주변에서 생기는 안개다』라는 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젊은 여성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이바라키 시를 읽는 여자 – 사진04

30대 남자
'나는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가 좋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실패를 무서워하고, 안정을 선택하여 버립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으면 더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낭독회에는,  2년전에 이바라키 노리코의 시를 번역한 정수윤 씨도 참가했습니다.
이바라키 시에는 지금 한국에서 사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말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번역가 정수윤씨 – 사진 05
.
정수윤씨(번역가)
“지금, 전세계에서, 남녀 평등의 문제라는 것이 있고, 옛날부터 남성은 밖에서 일하고, 여성은 가족을 받든다고 하는 것들이, 이제 무너지고 있지 않습니까 。
자기 안에 있는 자신다움, 자신의 순수성이나 감수성, 이런 것들을 지키면서, 자기의 인생을 걸어간다고 하는 힘이, 이 시집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국 독자에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울려주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바로 마음에 와닿는 이바라키 노리코의 말
  이바라키 노리코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사진 06
국경을 넘어 펼쳐지는 이바라키 노리코의 말.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가 있습니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 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유연한 마음을 잃은 것은 누구인가

짜증 나는 것을
가족 탓하지 마라
모두 내 잘못

초심을 잃어가는 것을
세월 탓하지 마라
애초부터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안 좋은 것 전부를
시대 탓하지 마라
희미하게 빛나는 존엄의 포기

네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바보야

- 자기 감수성 정도는/이바라기 노리꼬

47세가 된 디렉터의 나도,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에 지탱하여 온 한사람입니다.

만남은 20대, 포크싱어로 번역가의 나카가와 고로씨가, 이 시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후 새해가 되면 이 시를 수첩의 뒷 표지에 옮겨 쓰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나태한 자세를 바로잡고, 등을 바짝 펴게하여 줍니다.

이 시는 한 사람의 은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바라키가 마음을 가까이한 한국 시인
  한국시인 홍윤숙씨 – 사진 07

한국에서 독자가 많은 것을 알게 된 나는 어떤 사람을 취재할 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바라키가 평생, 신뢰를 보낸 여성시인 홍윤숙(洪允淑)입니다.

이바라키는 50세 목전에 공부하기 시작한 한글을 사용하여 한국의 현대시인의 작품을 번역했습니다.

홍윤숙은 그 중 한 명.

나는 15년 전에 이바라키가 사망한 직후에 서울자택을 방문하여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조촐한 집에서, 이바라키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아 있었습니다.

출판사를 통해 연락을 했는데, 불행히도 홍윤숙은 6년 전에 사망했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이바라키가 홍윤숙에게 보낸 친필편지를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알려 줬습니다.


27통의 편지 내용은 ?
  보관된 이바라키가 쓴 편지 – 사진 08

남겨진 이바라키의 편지는 소인 등으로부터 1979년부터 2006년까지 나온 27통이라고 알았습니다.

허가를 받았고, 그 모든 것을 읽어 주셨습니다.
서로가 한일을 오가며 30년 동안 교류를 계속한 두 사람.

이바라키의 편지에는 서울에서 받은 접대에 대한 감사와 도쿄를 찾은 홍윤숙씨에게 감사를 받고 "다음에 뵐 수 있는 날을 학수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재회를 강하게 원하는 편지 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놀란 편지가 있었습니다.

한글로 쓰여진 이바라키 편지
  한글로 쓰여진 이바라키 편지 – 사진 09

소인은 1979년 3월.

아직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이바라키가 홍윤숙씨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는 한글로 3장에 걸쳐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바라키는 아직 배운지 얼마되지 않은 한글을 사용하여 홍윤숙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였을까요?


홍윤숙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바로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조금 몸이 좋지 않은 날이 계속되고 있고 만년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답장이 늦어진 것을 용서해 주세요.

홍 선생님의 편지는 멋진 일본어 문자였습니다.
언어를 빼앗은 것은 전쟁 전 일본의 죄라고 생각하고, 나는 땀을 흘리면서 한국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신주쿠의 한국어교실에는 일본인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그런 생각일까요?
필시 • •.

(중략)

또 편지를 주실 때에는 한국어로 써 주십시요.
내가 공부하기 위하여.
안녕.

1979년 3월 6일
이바라키 노리코

현재 북한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홍윤숙은 일본어가 능통했습니다.
그것은 20세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식민지하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홍윤숙은 그 때의 생각을 자술한 책속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대 사춘기 무렵, 일본 군국주의에 의하여 비참한 전란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서 처음 있었던 것, 나약한 감각을 관통하여 오는 공포, 곤궁, 혼란의 괴로움 이었다 말과 이름을 빼앗기고, 아침 저녁으로 사용하던 식기와 숟가락마저 가져간
수탈과 공포의 나날(중략) 아직도 나의 인생의 일부에,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로서 남아 있다」

이바라키는 한글을 배우는 계기 중 하나로 홍윤숙과 만났을 때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어가 능숙하네요』 그 유창함에 무심코 감탄의 소리를 하자, 『학생시절에는 쭉 일본어 교육을 받았었다는 것』 앗하고 늦게사 자신의 우둔함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한글로의 여행』)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36년간 일본어 교육한 것은 머리로 잘 알고 있었으나 그 아픔까지 포함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바라키의 편지에 대해, 3주일 후, 혼으로부터의 회신이 도착합니다.

이바라키 선생님, 한국과 일본과의 과거의 정치적 관계는 매우 슬픈 일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 슬픔을 거의 잊어 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이웃으로서 새로운 인간 관계와 우정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계신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1979년 3월 27일)


 홍윤숙의 딸 양주혜씨 – 사진 10

편지를 보여준 것은 홍윤숙의 딸 양주혜씨입니다.  양씨는 어렸을 때 일본어는 사용하지 않도록 홍윤숙한테 엄하게 책망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홍윤숙이, 이바라키와 교류를 계속하는 가운데, 일본에의 눈초리가 조금씩 바뀌어 갔다고 합니다.

홍윤숙의 딸 양주혜씨
「어머니는 한일간의 대립이 일어나고 한국 여론이 끓고 있을 때 그것을 상식에 맞게 바르게 보도록 하였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흐르지 말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데 편들면 안된다고.
당신들은 일본문화에 대하여 더 잘 알아야 한다
이처럼 말씀을 많이 하여 주셨습니다 」


「이바라키 노리코 씨는 어머니가 얼마나 말에 대한 아픔이 있었는가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서 품어 주셨습니다.
그 일이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놓은 것이 아닐까요.」

취미로 끝나지 않은 이바라키 한글
  이바라키가 번역한 홍윤숙의 詩 – 사진 11

편지는 80년대 후반이 되며는 당시 이바라키가 시름하고 있던 한국시의 번역에 대해 상담하는 내용이 많아집니다.

이바라키는 공부를 계속해 온 한글을 살려서 당시 일본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의 현대 시인의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1988년 4월 소식에 의하면 홍윤숙의 대표적인 시 '海'의 번역을 확인하는 소식이 나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아름다운 시를 좋은 일본어로 게재하고,
한국시의 높은 수준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이상한 곳은 없습니까?  알려주세요.


바다  — 바다의 언어

우리들이 큰 바다를 갈 때
한 덩어리의 구름이 되어
바다 위를 여행할 때

굉장히 멀리있는 축이나 갑판 위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더 할 나위 없이 따뜻한 혈족처럼
손을 흔든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그리 간단하게 흘러 없어지지 않는 시를 선택하려고 했으나,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완성해 나가고 싶습니다.


1990년, 이바라키는 스스로 선택한 12명의 한국 시인의 작품 60편 이상을 번역하여 『한국현대시선』으로 발표.

시집은 한국의 현대시를 모아서 정리한 형태로 처음 소개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홍윤숙은 그 소식을 듣고 이바라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

훌륭한 일의 성과, 정말 기뻐요, 선생님의 시인으로서 또 하나의 뛰어난 역량이 담겨져 있어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올 겨울은 꼭 천천히 쉬시길 바랍니다.
한 나라의 언어로서,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를 번역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정신문화 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에서 선생님은 진정으로 큰 작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한겨울 정도는 충분히 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11월 28일)


국경을 넘은 마음의 교류
  이바라키 씨 (왼쪽)와 홍윤숙 씨 (오른쪽) – 사진 12

홍윤숙의 딸 양주혜씨에 의하면 홍윤숙은 죽기 전에 자신의 소지품의 대부분을 처분하고 있었지만, 이바라키로부터 받은 편지는 소중히 남겼다고 한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는지 물어보니까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홍윤숙의 딸 양주혜씨
「이것은 선생의 집 같군요.
이바라키 선생의 복장을 봐주세요。
에이프런이 아닌가요
이것이야말로 여자고교생 친구가 만나서 조금 흥분하여 둘이서 수다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어머니는, 이바라키 선생님이 고생하면서도 한국의 시를 일본에 소개해 주신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단지의 교우관계였다면, 거기에는 혼이 들어간 이야기는 없었을테지요.
시인의 정신을 가지고 서로 교류한 것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세계가 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바라키 노리코가 뿌린 여러개의 種
나는 27통의 편지를 읽고 나서, 이바라키 노리코의 육성에 조금이나마 접촉할 수 있었던 느낌이 들었습니다.

곧바른 정중한 문자로 쓰여진, 한국의 친구나 한국 시에 대한 생각.

거기에 자신이 느낀 것을 뒤집어 지키는 이바라키 노리코의 삶의 방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바라키 시에는 '작은 소용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지한 일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먼 곳에
작디 작은 소용돌이를 만든다

그것은 바람에 옮겨지는 종자보다도 자유로이
좋아하는 진로를 택하여
좋아하는 곳에 꽃을 피운다

이바라키 노리코 「작은 소용돌이」

이바라키 노리코가 뿌린  種은, 시간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여기 한국에도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NHK서울지국 수석 프로듀서 – 사진 13
나가노 케이고
1998년 입국 21년 7월 서울지국에 부임
한국의 사회문제나 영화 등 문화를 주로 취재
 
2021年12月28日 20時29分

自分の感受性くらい
自分で守れ
ばかものよ

茨木のり子「自分の感受性くらい」

生き方に迷う時。自信が持てない時。大きなものに流されてしまいそうになった時。
多くの人の背中を押してきた詩があるのをご存じですか?
その詩人のことばは、韓国でも愛され、広がっています。その理由とは?
(ソウル支局 ディレクター 長野圭吾)

韓国でも愛される 茨木のり子のことば
 
 茨木のり子の朗読会(ソウル)

11月中旬。

韓国の観光名所、ソウルタワーのふもとにある小さな書店で、日本を代表する詩人・茨木のり子の朗読会が行われました。

今年で没後15年となった彼女の詩は、日本で世代を超えて愛されてきました。

実は茨木の詩は、数年前からハングルにも翻訳されるようになっています。

この日も、20代から30代の若者たちが集まり、自分の好きな詩を選んで朗読し、感想を語り合っていました。
 韓国で出版された茨木のり子の詩集

高校教師の30代の女性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は、私の祖母のことにように感じられました。
祖母にも“きれいな時”があったのだと、気づかされ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


同じく30代の女性は、『みずうみ』という詩を選びました。
「私はこの詩の『人間の魅力とは たぶんその湖のあたりから 発する霧だ』という言葉が美しいと思い、母にプレゼントしました。
若い女性として共感できる部分が多いと感じました」


 茨木の詩を読む女性

30代の男性
「僕は『この失敗にもかかわらず』がよかったです。
年を取ると失敗を怖がって、安定を選んでしまいます。
でもこの詩を読むと、もっと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気持ちになります」

朗読会には、2年前に茨木のり子の詩を翻訳したチョン・スユンさんも参加しました。

茨木の詩には、いま韓国で生きる若者たちに必要な言葉が詰まっていると言います。

チョン・スユンさん(翻訳家)
「今、世界中で、男女平等の問題とかがあって、昔ながらの、男性は外で働く、女性は家族にささげるというかたちが、もう崩れているじゃないですか。
自分のなかにある自分らしさ、自分の純粋性だったり感受性だったり、そういうものを守りながら、自分の人生を歩んでいこうという力が、この詩集のなかに入っていると思う。
だから今の韓国の読者に、特に若い女性の方に響くところがあると思いました」


 翻訳家 チョン・スユンさん

まっすぐに心に届く 茨木のり子のことば
  茨木のり子「自分の感受性くらい」
国境を越えて広がる茨木のり子のことば。

その中でも、多くの人に愛されている詩があります。


ぱさぱさに乾いてゆく心を
ひとのせいにはするな
みずから水やりを怠っておいて

気難かしくなってきたのを
友人のせいにはするな
しなやかさを失ったのはどちらなのか

苛立つのを
近親のせいにはするな
なにもかも下手だったのはわたくし

初心消えかかるのを
暮しのせいにはするな
そもそもが ひよわな志にすぎなかった

駄目なことの一切を
時代のせいにはするな
わずかに光る尊厳の放棄

自分の感受性くらい
自分で守れ
ばかものよ

茨木のり子「自分の感受性くらい」


47歳となったディレクターの私も、「自分の感受性くらい」に支えられてきた一人です。

出会いは20代、フォークシンガーで翻訳家の中川五郎さんが、この詩にメロディーをつけ歌っているのを聞いたことでした。

以来、新年になると、この詩を手帳の裏表紙に書き写すようになりました。

自らの甘い姿勢を正し、背筋をシャキっと伸ばしてくれる。

この詩は、ひとりの恩師のような存在となっていきました。

茨木が心を寄せた 韓国の詩人
  韓国の詩人 ホン・ユンスクさん

韓国での読者の広がりを知った私は、ある人を取材できないかと考えました。

茨木が生涯、信頼を寄せた女性詩人ホン・ユンスク(洪允淑)です。

茨木は、50歳目前で学び始めたハングルを使って、韓国の現代詩人の作品を翻訳しました。

ホンはその中の1人。

私は15年前に茨木が亡くなった直後に、ソウルの自宅を訪ね、取材したことがありました。

物静かなたたずまいで、茨木の死を深く悼む姿が印象に残っていました。

出版社を通じて連絡を取ったところ、残念ながらホンは6年前に亡くなったと知らされました。

しかしご家族が、茨木がホンに宛てた手紙を、いまも大切に保管していると教えられました。


27通の手紙 中身は?
  保管されていた茨木の書いた手紙

残されていた茨木の手紙は、消印などから1979年から2006年までに出された27通だと分かりました。

許可をいただいて、そのすべてを読ませていただきました。

お互いに日韓を行き来しながら、30年にわたり交流を続けた二人。

茨木の手紙には、ソウルで受けたもてなしに対するお礼や、東京を訪ねたホンさんへの感謝がつづられ、「次にお目にかかれる日を鶴首してお待ちしています」と、再会を強く願う手紙が数多くありました。

その中でも、私が驚かされた手紙がありました。

ハングルで書かれた茨木の手紙
  ハングルで書かれた茨木の手紙

消印は1979年3月。

まだ二人が出会ったばかりの頃に、茨木がホンに宛てた手紙でした。

驚いたことにその手紙は、ハングルで3枚に渡り書かれていました。

茨木はまだ習って間もないハングルを使い、ホンに何を伝えようとしたのでしょうか?



ホン・ユンスク先生へ

こんにちは。すぐに手紙をくださって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お久しぶりです。
私は少し体調が悪い日が続いていて、万年筆を持てないでいました。
返事が遅れてしまったこと、許してください。

ホン先生の手紙は、素晴らしい日本語の文字ですね。
言葉を奪ったことは、戦前の日本の罪と考えて、私は汗を流しながら韓国語の勉強を続けています。
私が通っている新宿の韓国語教室には、日本人がたくさんいます。彼らもそんな考えでしょうか?
おそらく・・。

(中略)

また手紙をくださる時には、韓国語で書いてください。
私が勉強するために。
さようなら。

1979年3月6日
茨木のり子

現在の北朝鮮・ピョンアン(平安)北道で生まれたホン・ユンスクは、日本語が堪能でした。

それは、20歳で戦争が終わるまで、日本の植民地下で日本語教育を受けてきたためでした。

ホンはその時の思いを自著の中で、こう記しています。


「十代の思春期のころ、日本の軍国主義によって悲惨な戦乱を経験した。それは私の人生の中で初めての、か弱い感覚を貫いていく恐怖、困窮、混乱の苦しみだった。言葉と名前を奪われ、朝夕に使っていた食器とスプーンまで取られた収奪と恐怖の日々(中略)いまだに私の人生の一部に、消えない影として残っている」

茨木は、ハングルを学ぶきっかけの一つに、ホンと出会った時のある出来事があったと記しています。

「『日本語がお上手ですね』その流暢さに思わず感嘆の声をあげると、『学生時代はずっと日本語教育されましたもの』。ハッとしたが遅く、自分の迂闊さに恥じ入った。」(『ハングルへの旅』)
日本が朝鮮半島を植民地化した36年間、日本語教育したことは頭ではよく分かっていたつもりだったが、その痛みまで含めて理解できていなかったと記しています。

茨木の手紙に対し、3週間後、ホンからの返事が届きます。
茨木先生、韓国と日本との過去の政治的な関係はとても悲しいことではありましたが、
いま私たちはその悲しみをほとんど忘れてしまっています。
これからはよき隣人として、新しい人間関係や友情を結べ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多くの日本人たちが韓国語を学んでいらっしゃるということ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
(1979年3月27日)

 ホン・ユンスクの娘 ヤン・ジュヘさん

手紙を見せてくれたのは、ホン・ユンスクの娘、ヤン・ジュヘさんです。ヤンさんは、幼い頃、日本語は使わないようホンに厳しくとがめられたことを覚えています。

しかしそのホンが、茨木と交流を続ける中で、日本へのまなざしが少しずつ変わっていったといいます。

ホン・ユンスクの娘 ヤン・ジュヘさん
「母は日韓で対立が起き、韓国の世論が沸き立つたびに、それを常に正しく見ようとしていました。
一時の感情に流されて、好き嫌いに偏ってはいけないと。
あなたたちは日本文化についてもっとよく知るべきだ。
そのような話をずいぶんしてくれました。」

「茨木のり子さんは、母がどれだけ言葉に対する痛みがあるかを理解して、またそれをご自分の痛みとして抱えてくださった。
そのことが母の心をほぐし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趣味で終わらなかった 茨木のハングル
  茨木が翻訳したホンの詩
手紙は80年代後半になると、当時茨木が取り組んでいた韓国詩の翻訳について相談する内容が多くなります。

茨木は勉強を続けてきたハングルを生かして、当時日本で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韓国の現代詩人の作品を、日本に紹介したいと考えていたのです。

1988年4月の便りには、ホン・ユンスクの代表的な詩「海」の翻訳を確認する便りを送っています

できることなら
この美しい詩をよい日本語で掲載し、
韓国詩の高い水準をたくさんの人に知らせたいと考えています。
変なところはないですか?教えてください。


海  ―海の言葉

わたくしたちが 大きな海を行く時
ひとかたまりの雲になって
海の上を 旅立つ時

はるかかなたの舳や甲板の上で
互いに知らない人たちが
手を振る
またとない熱い血族のように
手を振る


時代の流れと共には、そう簡単に流れ去ってしまわない詩を選んだつもりですが、はたしてどうなっているでしょうか。

とにかく全力をあげて、完成にもっていきたいと思っています

1990年、茨木は自らが選んだ12人の韓国詩人の作品60編以上を翻訳し、『韓国現代詩選』として発表。

詩集は、韓国の現代詩をまとまった形で初めて紹介したとして高い評価をえました。

ホンは、その知らせを聞き、茨木に手紙を送っています。

ご立派なお仕事の成果、本当にうれしく、先生の詩人としてのもう1つのすぐれた力量がしのばれて尊敬の念を禁じえません。この冬はぜひゆっくりお休みなさいますよう。
一国の言語と、その中でも一番難しい詩を訳することは、その国の精神文化を観察することだと思います。
その意味で先生は真に大した作業を完成なさったのです。
一冬くらいは十分休む権利があると思います。
(1990年11月28日)
国境を越えた心の交流
  茨木さん(左)とホンさん(右)

ホン・ユンスクの娘、ヤン・ジュへさんによると、ホンは亡くなる前に自身の持ち物の大部分を処分していましたが、茨木から受け取った手紙は大切に残していたそうです。

二人はどのような関係だったかと聞くと、1枚の写真を取り出して、見せてくれました。

ホン・ユンスクの娘 ヤン・ジュへさん
「これは先生のお宅みたいです。
茨木先生の服装をご覧ください。
エプロンじゃないですか。
これこそ女子高生が友達に会って、少し興奮してお二人がおしゃべりを楽しんでいるように見えませんか。

母は、茨木先生が苦労なさりながらも韓国の詩を日本に紹介してくれたことを喜んでいました。
二人がただの交友関係であったなら、そこには魂の入った話はなかったでしょう。
詩人の精神をもって互いに交流したからこそ、私たちにはとてもじゃないけど想像できないお二人だけの世界があったのだと思います」


茨木のり子がまいた いくつもの種
私は27通の手紙を読み終えて、茨木のり子の肉声に少しだけ触れたような気がしました。

まっすぐ丁寧な文字で書かれた、韓国の友人や韓国詩への思い。

そこに自分の感じたことをひるまずに守る、茨木のり子の生き方を感じとることができたからです。

茨木の詩に「小さな渦巻」という作品があります。

ひとりの人間の真摯な仕事は
おもいもかけない遠いところで
小さな小さな渦巻をつくる

それは風に運ばれる種子よりも自由に
すきな進路をとり
すきなところに花を咲かせる

茨木のり子「小さな渦巻」


茨木のり子がまいた種は、時を越え、国境を越え、ここ韓国にも花を咲かせています。


 
ソウル支局 チーフ・プロデューサー
長野圭吾
1998年入局 21年7月にソウル支局に赴任
韓国の社会問題や映画などの文化を主に取材

https://www3.nhk.or.jp/news/html/20211228/k10013406381000.html
人生を바꾸는“말” 韓国에서 만난 이바라키 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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