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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49회 작성일 20-08-28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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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이가 소개해준 블로그를 보니 우리가 모르던 태어나기 전 시대에 부용에서 일어났던 것들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 내용은 주로 부용역, 농협, 영단 그리고 신작로에 있는 남아있는 건물, 가게와 우리의 어린시절 신작로에 대한 상상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부용역 가까이 위치하던 영단이 과거에 오오쓰미 도정공장였었고, 농협, 커다란 창고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대량의 쌀반출하는 과정의 흔적으로 보여집니다

구 백구 금융조합이라고 소개된 역근처에 있던 부용 농협건물은 안에 들어가면 사무실의 천장이 높아 방문자가 약간 주눅이 드는, 그 당시 부용이라는 시골동네에서는 좀 어울리지 않았다고 기억되는, 부용의 다른 어느 곳에도 그러한 건물은 없었습니다
뒤편에는 좋은 나무와 화단이 있는 사택도 딸려 있었고 . .

나는 철길 넘어 논에 가면서 늘 그 옆을 지나 다녔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좀 궁금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릴때 그러한 부용역 주변 커다란 창고들은 그냥 위용만 덜그러니 자리잡고 있을 뿐 가득차게 이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역 철로변에 있는 마라부시(?) (철로쪽으로 짐을 짐칸에 실기전 임시 보관하던 곳)를 관련시켜 우리가 태어나기전에 벌어졌던 일에 대하여 가능성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봅니다

그러니까 1914년 1월1일 부용역 개통을 전후하여 부용지방 상당히 넓은 들에서 생산된 나락들은 농협 바로앞에 있는 창고에서 농민들이 가져 온 것을 농협 주관하에 수매하였겠지요
(그 창고는 앞 부위에 비를 맞지않고 수매를 할 수 있는 처마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큰 도정공장인 영단(오오쓰미 도정공장)에서 가져온 나락을 쌀로 찌은 후 그 쌀을 역앞 큰 창고에 보관하다가 기차가 화물칸을 달고 도착하면 마라부시에서 열차에 실고 이리를 경유하여 군산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릴적 그렇게 큰 창고를 누가 어떻게 이용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돈많은 부자가 부용쌀 또는 고구마, 콩들을 다량으로 장사하기 위하여 그 창고에 보관하고 서울이나 다른 지방으로 팔기 위해 이용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시대에 농협, 영단, 창고 등이 존재하였고 그것들을 우리가 이어 받았지만 그 시대에 부용 들판에서 나는 쌀을 점령자로 다스리는 입장에서 갓쓰고 곰방대를 들고 짚세기를 신고 하얀 한복을 입었던 잘 알지도 못하는 우리 부모세대 농사꾼들에게서 쌀을 대량으로 제값(?)을 쳐주고 구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것들을 '수탈'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방이 된 후로는 상황이 변해 용도가 크게 줄어든 채로 그냥 그대로 유지 됐었겠지요 창고는 정부나 농협 소유였을테니까
그 다음 거기에다 우리민족 상잔의 전쟁까지 겪으면서 우리는 언제 그랬었냐는듯이 모른 채 태어났겠지만 . .
 
나는 그 창고에 들어가보고 쌓인 가마니 더미 위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농한기에 사내끼(새끼) 꽈서 또 가마니를 짜서 수매하려고 가지고 창고에 갈 때였습니다
사내끼는 아버지 혼자 꽜었습니다,
가마니짜기는 우리집 작은방에서 온식구들의 작업으로 볏짚으로서 가마니 짜는 나무로 만든 기계를 이용 '쿵쾅쿵쾅' .
나도 점점 크면서 가마니를 짯고 그것들을 수매 하는데 도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시절의 창고는 쌀은 소량이고 대신 농사필수품인 주로 비료였던 같으며 수매한 새끼, 가마니들이 저장된것 같습니다
그것은 학교 다닐 때 역에서 보면 그 마라부시에는 농사용 비료가 쌓여 있었으며 나중에는 소주공장에서 발효재료로 이용되는 고구마가 화물차에 실기 위해 넘치도록 잔뜩 쌓여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사진 또한 어릴때 낯익은 풍경이었습니다

사진속에 저기가 아버지랑 함께 쌀 찌으러 갔던 영단입구, 그옆은 파출소앞에 나중에 지은 농협표시가 그려진 창고, 저기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으러 자주 갔던 주장(양조장), 저기는 삼거리로 미장원, 철물점, 이발소가 있던 곳 등등

신작로 삼거리에 있던 이발소는 어릴 때 내가 여러번 머리를 깍았었고, 현애아빠가 운영하던 철물점은 농사용 공구들이 필요할 떄 이따금 우리집에서 이용했었지만 나중에 진해로 이사가 버리고 미장원은 동네 이쁜 아줌마들이 많이 이용했었지만 . .

그러나 영순이 글의 주제는 열차가 서지않는 부용역이었습니다
먼곳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혜택을 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역이지만 마음속으로 괜히 좀 씁쓸합니다

호남선 중간에 위치하여 서울, 목포행 완행열차로 주로 영호아버지와 같이 부용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로 갈때, 올때  이용했었지요
또한 통학열차를 타기 위해 기차시간이면 역에 구름같이 모였고 멀리 농원의 상준, 인성이도 왔었으며, 나 또한 중고교 6년간 부지런히 부용역을 들락거렸었습니다
통학기차가 오는 소리에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밥을 먹다말고 책가방을 들처매고 달리는 단거리 마라톤도 많이 했었습니다
나중 70년대에 들어와 버스가 부용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쪼매 이용을 줄였지만 . .

우리가 어릴떄 부용역에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아마 시골 부용은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만큼 부용역은 통학생 뿐만 아니라 출퇴근 직업인, 장사를 위하여 이리로 물건 띠러/사러 가는 사람, 영화보러 가는 사람,  그리고 통학하는 우리 친구들을 볼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었는데  . .
2008년 그만 문을 닫았답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없이 . . . 목포행 완행열차 ~~' 대전블루스 노래의 가사처럼 '붙잡아도 뿌리치는 . . '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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