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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죽음에 관한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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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웃음
댓글 0건 조회 344회 작성일 24-10-2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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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별안간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워하는 줄 알았는데 일부 반대하고 시기하는 의견들도 있기도 하여 혹시나 하며 우리보다 먼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웃나라의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어째서 죽었는가를 살펴 보다가 노벨상 수상 전후에 있었던 여러가지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을 받을 때는 무척 기쁘겠지만 일단 받은 다음은 글을 쓰는 작가 입장으로서 매우 힘들고 어려움이 많을 것이 예상 되기도 합니다

호사다마에 反面敎師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먼저 노벨상을 받았던 그들이 분석한 대담 내용을 공유하기 위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원본 : https://www.nhk.or.jp/gendai/articles/4241/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죽음에 관한 비화(인터넷 번역)
<2019년 2월 4일(월)>

1968년에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 때 동시에 후보가 되고 있던 것이 미시마 유키오였다.
1월 스웨덴 아카데미가 당시 전형 과정을 공개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향후 성장에 따라 재검토도'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 2년 후에, 미시마는 할복 자살하고 게다가 그 2년 후,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가스 자살을 한다.
두 사람은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미야모토 아몬 씨를 네비게이터로서 대담하게 풀고 해석하여 본다.

<출연자>
미야모토 아몬 씨 (연출가)
히라노 케이이치로(소설가)
나카에 아리사토(여배우·작가)
다케다 신이치 (캐스터)

○ 미시마 유키오가 노벨상을 수상했다면

미야모토 : 모처럼 만의 노벨상, 그리고 2년 후의 미시마 자결, 또 2년 후의 카와바타의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뭔가 영향이 있을까 궁금한 곳이지요.
솔직히 개인적으로 말하면, 그 미시마 유키오가 노벨상 수상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이에요, 개인적인, 문학자로서는 . .

히라노 : 저는 미시마의 「긴카쿠지」를 읽고 문학에 눈을 뜨고, 정말로 미시마 없이는 자신이 소설가가 될 수 없었다는 정도로 매우 큰 영향을 받았지만, 노벨상을 받는 작가라고 하는 것에 손을 든다고 하면 또 조금 인상(印象)은 달랐다고 생각하네요.

나카에:미시마가 만약 받았다면, 카와바타의 노벨 문학상도 없었을 것이군요. 더블 수상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지금까지의 것을 생각하면. 그러니까, 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나는 솔직한 인상입니다. 아무래도 연공서열이라고 할까, 역시 윗분이 취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 반세기를 명백하게, 노벨상을 둘러싼 두 사람의 생각
미야모토가 먼저 방문한 것은 미시마의 마지막 장소가 된 자위대의 주둔지. 여기서 미시마는, 일본도를 손에 자위대의 간부를 감금한 뒤, 할복을 한 것입니다.

「刀傷(칼로 인한 상처).」

미야모토 아몬 -
「이것은 미시마 유키오 씨가 붙였는가 ?」
「(미시마가) 『방해하지 말아라, 나가라』라고 옥신각신한 것 같다.」

미야모토 아몬 -
「여기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의문만 남네.」

「潮騒(시오소)」나 「金閣寺」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미시마 유키오.
문단 데뷔의 계기는 카와바타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소설을 직접, 카와바타에 팔아 문예지에의 게재를 뒷받침하여 주었습니다.
일약 인기 작가가 된 미시마. 해외 신문에서 「세계의 문호」라고 소개되기까지 되었습니다.
점차 미시마는 노벨상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고 담당한 편집자들은 말합니다.

14년간 미시마를 담당한 편집자 코지마 치카코씨 -
「노벨상만은 미시마 씨의 생각에도, 각별한 것으로서 생각했다. 그때까지 받았던 여러가지 상과는 다르게.」

미시마와 친한 편집자 사쿠라이 히데이사 씨 -
「(미시마는) 자신에게는 그 가치가 있다고. 그의 자부였었다고 생각한다.」

그 미시마를 카와바타는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노벨상 수상 4년전, 취재로 미야자키에 체재했을 때의 일입니다.

미야자키에서 가와바타를 안내한 와타나베 츠나시 씨 -
「『(가와바타) 선생님, 아직 일본인은 노벨 문학상을 아무도 받지 않았지만, 일본인으로 최초로 받는다면, 누구입니까」라고 말하니까, 흠, 그야말로 그자리에서 「그것은 미시마 유키오 군입니다. 미시마 유키오 군이 반드시 받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씨 이외에는, 노벨문학상은 일본인에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미시마와 카와바타 사이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 문학관 관장 사토 히데아키 씨 -
「사진집이군요.」

가와바타의 수상 前年, 미시마가 쓴 정원에 대한 평론. 거기에는 이상한 구절이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작가의 작품을 결코 읽지 않는다. 그는 원숙하고 훌륭한 작품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 문학관 관장 사토 히데아키 씨 -
「이 시대에, 이런 원숙한 훌륭한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라고 하면, 카와바타 야스나리를 떠올리는 것은, 제일 자연스러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뭔가 차가운 찌르는 것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두명 사이에 노벨상을 둘러싼 생생한 거래가 있었다고 하는, 새로운 증언이 도착했습니다.
미시마가 다룬 무대의 많은 주연을 맡은 여배우 무라마츠 에이코 씨입니다. 가족들 모두와 친교를 깊게 하는 중, 미시마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이번 처음으로 털어 놓았습니다.

미야모토 아몬 씨 -
「무언가가 있었던가, 둘 사이라고 하는 것은?」

여배우 무라 마츠 에이코 씨 -
「미시마 선생님은 카와바타씨의 집에 불려가서, 『너는 아직 젊고, 나는 나이가 있으니까, 이번은 양도해 주지 않을까』 라고 부탁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었던 카와바타씨로부터, 그런 것을 말해진 것이 쇼크였던 것 같습니다」

카와바타는 그 이전에도 노벨상에 대한 의뢰를 미시마에 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말했던 노벨상 문제, 매우 간단하면 좋으니까 추천문을 써주시겠는가?”

그리고 1968년의 수상.  카와바타는 「번역자 덕분」,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군이 너무 젊다는 것 덕분입니다」라고 코멘트했습니다. 그 미시마는 곧 축하하러 달려갑니다.

미시마 유키오 -
「카와바타 씨는 제일이군요, 힘을 넣지도 않고 힘을 사용하게 된다고 하는 예술 위의 요령을 아시는 예술가가 아닐까 생각하고. 검도에서도 제일 강한 타입이군요. 또한 『아무것도 고누지 않는 겨냥』이군요.

다케다 : 히라노 씨, 어떤 식으로 보셨습니까?

히라노:저는 조금 방금전의 VTR 의 의견과 조금 달랐고, 미시마는 30대 후반은, 별로 자신의 일에 자신 만만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상업적으로도 「金閣寺」 등의 시기에 비하면 부수가 굉장히 떨어져 있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은, '오에'씨라든지 한층 아래 정도의 작가에서도 굉장히 힘이 있는 작가가 나오고, 그쪽으로 굉장히 독자 옮겨 갔기도 하고.

미시마가 어떤 인생을 걷는가 하는 것은, 40이 될 정도까지 꽤 헤매고 있고, 40이 되어도 조금 잠시 헤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니까 노벨상을 갖고 싶었던 것은, 반대로 말하면 조금 자신감이 없었는지, 자신의 활동, 국내의 평가에서도 반드시 나쁘지 않았지만, 당시의 비평 등을 읽으면. 하지만 국제적인 賞에서 자신의 활동이 백업되면 좋겠다는 느낌은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미야모토 : 하지만 미시마 씨는 역시 세계 일주하고 나서, 정말로 외국에 인정받는다는, 탐욕할 정도, 브로드웨이에서도 무대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계속 미국에 체재하거나도 포함한다면, 이것 정도 해외에 표적으로 하는 것을, 거기를 목표로 하고 있던 사람은 아닐 것이네요.

나카에:카와바타라고 하며는, 미시마의 일도 그렇고, 다른 재능 있는 작가, 신인 작가의 뒷받침을 하고 있었지요. 혹시 카와바타는, 역시 미시마를 귀엽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점점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온다.
그것은 자신의 눈으로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결과가 되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같은 상을 다투는 입장이 되었을 때, 카와바타의 심경은 상당히 복잡했던 것이 아닐까 상상하였지요.

히라노 : 대체로 일본 국내에서 어느 쪽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네요. 왜냐하면 일본인에게 누군가를 주려고 하는 것 같은 이야기로 결국 리서치에 와서, 타니자키나 가와바타나 미시마 같은 것을 여러 사람에게 인터뷰하고 있어, 결국 그러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기 때문에, 가와바타도 미시마에 의뢰 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말하면 이상한 이야기지요. 그 상을 주는 쪽과 다른 사람들이 선배 후배로 어느 쪽이 양보할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조금, 당사자들도 기분이 좋지 않은 곳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미야모토 : 노벨상을 받은 후에는, 카와바타 씨가 받은 후에 「미시마가 앞으로 10 년을 기다릴까 어쩔까」 정도의 일을 내놓고 말했다고 하는 것이 있고, 미시마 씨는, 자신의 인생과 작품을 철저한 계획성으로 결정하여 가는 건 않는 것인가?  정말로 그가 어디까지 살려고 하고 있었는지라고 하는 것과, 뭔가 이렇게, 年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 보통의 인생의 일생이라고 하는 사고방식, 그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거기서 역시 이 시기에 노벨상이 라는 것은, 무엇을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하는 것에 흥미가 있습니다만.

나카에:실제로, 2명의 왕복 서한을 읽고 있으면, 2명 모두 자신의 작품을 서로 보내고 있어고, 반드시 그것에 대한 소감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어느 쪽인가 하면 미시마 유키오 쪽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해서, 정말로 편지의 양도 엄청 많고, 내용도 길어요. 그것을 보고 있으면, 뭐라고 할까 「숭배하는 가와바타 선생님」이라고 하는 느낌도 있기도 하고, 혹은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받는 아들과 같은 점도 있고, 상당히 두명의 관계라고 할까, 푸념 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쓴것은 전혀 받을 수 없다」같은 느낌으로서. 그런 곳을 보며는, 미시마는 굉장히 気弱한 면이 있고, 그것을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는 보여주었구나라고 생각한다.

○ 미시마의 자결, 운명은 바뀌었습니까?
카와바타의 노벨상이 정해진 1968년 10월. 같은 달에 미시마는 민간방위조직 「방패(楯) 모임」을 결성합니다. 학생들 100명을 모아, 자위대의 체험 입대나 무술 훈련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미시마의 자결에 관련된 「방패(楯) 모임」.  미야모토 씨가 만난 것은 그 전 간부 ・ 혼타 키요시 씨입니다. 혼타씨는 미시마의 죽음 직전까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방패(楯) 모임』 전 회원 혼다 키요시 -
「(미시마는) 이제 자신도 40세 지났다고. 문호로서 죽을지, 영웅으로서 죽을지, 정확히 그 기로에 왔다고.」

미야모토 아몬 -
「왜 이렇게 빠른 시기에 자결을 생각한 것 같아요?"

혼다 키요시 -
「50년 후, 100년 후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때 이른바,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었구나. 이것이 민족인 것이다.」

노벨상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던 미시마.  만약 수상했다면, 운명은 달랐을까…

미시마와 친한 편집자 사쿠라이 히데이사 -
「(미시마가) 노벨상을 받았다고 한다면, 받은 것에 대하여 책임을 그는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 후 (죽지 않고) 소설을 썼다고 생각한다.」

여배우 무라 마츠 에이코 -
「(상을 받았어도)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매우, 그 무렵의 일본에 대한 위기감, 이대로라면 본래의 일본의 아름다움이 점점 안타깝게 되어 가는 시기였던 것은 확실하니까. 」

○ 카와바타 자살, 미시마의 죽음이 영향을 받았는가?
미시마 자결 직후, 카와바타는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미시마의 죽음은 카와바타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가와바타의 집에서 도와주고 있던, 이나호 테루코씨. 미시마의 죽음 직후, 가와바타로부터 평상시는 부탁받지 않는 자료 수집을 지시받았다고 합니다.

이나호 테루코 -
「(카와바타) 선생님으로부터, 『미시마 유키오씨에 관한 자료는 전부 모아 놓으라』라고 말을 들었다. 『뭐든지 괜찮아』라고. 『잡지라도 뭐든지 좋으니까 잡아 두어 줘』라고 말했습니다. 」

카와바타는 미시마의 죽음에 직면한 심정을 이렇게 썼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신시오』 1971년 1월호)
“나는 미시마군의 『방패(楯) 모임』에 친밀한 동정은 가지지 않았지만, 미시마군의 죽음 생각에 머물게하려는 것은 방패(楯) 모임에 가까이, 그 곳에 들어가서,  '이치가야'의 자위대에도 미시마군을 따라서 갈 정도이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라고 생각한다. ”

노벨상 수상 후, 굉장히 바쁘게 지내게 된 카와바타. 연재하고 있던 장편 소설도, 이 시기를 경계로 집필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미시마의 죽음으로부터 2년 후. 카와바타도 자살합니다.
카와바타가 죽기 6일 전, 스스로의 심정을 엮어 넣은 편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과 서양 여자 대학 연구원 후카자와 하루미 -
「이쪽이군요.『이 봄은 꽃도 보이지 않고, 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병의 심약함에』.
『心弱함』을 매우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해에, 그 앞자리부터, 해를 따라, 카와바타의 언동을 보며는, 앞 예정을 넣어 가는 한편으로, 최근의 죽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 있습니다. "

만년의 가와바타를 6년간 진료한, 정신과 의사의 구리하라 마사나오씨.  바쁜 가운데, 카와바타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고합니다.

쿠리하라 마사 나오 -
「눈이 녹아서 졸려서 눈의 움직임이 느슨하다든가, 이것은 (수면제의) 약물 중독이라고 할까. 사실은 자신으로서는 창작이야말로 작가의 命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창작을 할 수 없다고. 굉장히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

카와바타와 친교가 있었던, 여배우 기시코 씨입니다. 카와바타의 죽음은 독자적인 미의식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배우 기시코 -
「카와바타씨는 저것(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게 되어 자살했다』라고 하는, 소문이 있었습니다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분이 아닙니다. 더 심이 굵은 쪽이었다.」

미야모토 아몬 -
「미시마씨가 먼저 죽은 것으로, 카와바타씨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기시코 -
"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와바다) 선생님이라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어두운 이미지가 아니라, 이제 끝내려 할려고.

○ 어떻게 읽고 해석할까, 노벨상과 미시마의 자결
다케다 : 두 명의 문호의 죽음, 그리고 노벨상이라는 존재. 미야모토씨, 여러분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어떤 것을 느끼셨습니까?

미야모토 :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나는 미시마 씨를 연극인이라고 하는 식으로 생각해 버리는 점이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대본을 만들고, 자신의 연출을 하고, 자신이 주연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고. 다만 역시 현실의 문제로 되며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시대의 흐름이라든가, 인간 관계로 변해 온다고. 그때 노벨상이라고 하는 것은 큰 계기로 되어, 궁극적으로 그 뒤 대본을 최종 단계까지 재작성하여,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예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좋을까, 아니면 인간의 하나의 삶의 방법으로서 보면 좋을까라는 것이 얽혀 와 버리는군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히라노 : 단지 현실적으로는, 그가 40세가 되고 나서, 1966년 정도부터 상당히 정치적인 언동을 첨예화 시키고 있고, 「방패(楯) 모임」결성 전부터 우익의 학생들과 꽤 긴밀하게 교류를 가지고, 자위대의 체험 입대라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68년에, 만일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여도, 이런 일로 되어서, 문학 한권으로 짜내는 것으로, 다음으로 맡겼다고 하는 것은, 조금 상황 적으로는 더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역시 전쟁 체험이 컸다고 생각하네요. 미시마는 「가면의 고백」을 읽어도 그렇습니다만, 전쟁에 가지 않았다면, 즉 살아 남기도 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므로, 굉장히 강한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어서, 전후 사회에 살아 남아, 특공대에서 죽은, 자신과 같은 나이 정도의 사람들이 있는 중에, 무엇을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에 상당히 골몰하여, 대의가 없는 세계를 어떻게든 살아 가고 있다고 하는 일이 자신에게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계속 반복, 반복하고, 일종의 「Survivor's guilt」라고 하는 큰 재해라든지의 뒤에 살아 남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로서, 잘 심리학등으로 말해집니다만, 그런 것은 역시 계속 안고 있지요.

○ 어떻게 읽고 해석할까, 노벨상과 카와바타의 자살
다케다 : 한편, 카와바타와도 친교가 있던 도널드 킨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 문학 연구자 도널드 킨 -
“『가와바타의 죽음에 대하여』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로서 레벨에 이른 작품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카와바타 선생은 죽음을 선택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와바타 선생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뛰어난 감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에 죽음을 택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모두 상상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

나카에:카와바타 야스나리는 「葬式의 名人」이라고 하는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몸이라든가 혹은 작가가 되고 나서도 많은 작가를 배웅하고 있는, 지켜보고 있습니다요.

그 중의 1명, 최후편에 해당하는 미시마 유키오를, 결국, 자신보다 훨씬 젊은데 장례위원장도 맡았습니다만, 역시 그러한 굉장한 죽음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 오고,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스스로 그 순간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구나가. 나도 어쨌든, 카와바타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여기서 결정한 것일까 하고. 누구에게 이 사람은 배웅해 주었으면 좋을까 라는 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거죠. 문호이면서 굉장히 쓸쓸한 느낌이 듭니다.

다케다 : 미야모토 씨, 취재를 하시고, 지금 다시 2명의 작품과 어떤 식으로 대하게 됩니까?

미야모토:인간의 모순 같은 것이 노골적으로 두 사람 모두로 부터 나오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있고, 그곳이 역시 지금부터도 계속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각각의 죽음이, 어쩌면 그러한 의미에서는 겹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면서, 수수께끼 많은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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