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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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웃음 작성일 24-05-13 06:13 조회 1,263 댓글 0본문
친구들 카톡방에 200회까지 시리즈로 올라 온 김삿갓 방랑기를 읽으면서 김병연이란 영뭘 살던 청년이 조선시대인 1826년 부터 나라 안 여러곳을 돌아 다니며 나타 낸 그때 사회를 엿 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과는 많이 달라 여러 느낌이 밀려와서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읽으면서 남북이 서로 갈라져 뇌리에서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안변의 동해에서 금강산 그리고 대동강, 강계 압록강변까지 묘사한 김삿갓의 방랑기를 보면서 바람을 피울 때는 내 몸의 청춘도 조금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 ! 거기도 우리 땅이었었구나' 하고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그때는 갈수 있었던 북한의 이곳 저곳과 선조들의 여러 생활상들을 알려 주었는데 어릴때 우리는 철로에 기차 다니고 전기가 들어 오기는 했지만 시골에서 사는 모습은 그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초가집과 물 맑은 강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것도 . .
어렸을 때 2년 연배인 동네 선배는 다들 다니는 국민학교에 가질 않고 이웃 동네 서당으로 다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거기서 '하늘 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하며 천자문을 배웠겠지요
삿갓 시대는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합격하거나 조정의 배경에 의하여 관리로 임명되어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알고 한문시를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로운자 이겠지만 한문 실력만으로 어떻게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 .
관리가 지방을 잘못 관리하고 자기 욕심만 챙기면 관아를 얕보면서 김병연 할아버지와 관련되는 홍경래, 후에 전봉준과 같이 봉기하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중국이 옆에 있는 전반적으로 느슨한 사회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이웃 나라는 칼만 차고 있으면 무서운 것이 없고 주군 위해 목숨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섬 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 서로 싸우다가 하나로 통일되어 쓸모없는 군대를 여새로 임진왜란 일으킨 후 여러 지방 세력권자인 다이묘들을 거느리며 다스리고 무력이 집중되는 최고 권력자의 대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씨받이를 위해 궁중에 '금남(禁男)의 공간'을 만들어 정실과 측실, 시녀 등 쇼군만을 위한 여성 1000여명이 노출 안되게 모여 살던, 무사들은 항상 칼을 차고 다니는, 죽으면 화장하며 묘지가 없는, 서민 삶이 고달픈 엄격한 사회인데 비하여 . .
그 시절 김삿갓은 과거에 합격했던 똑똑한 사람으로 풍류를 즐기며 시로서 잘 표현하고 풍자하여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으며 구경하면서 산과 강 시골, 산골길을 걸어 다니면서 남은 거리도 나타내고 경치를 세세하게 잘 묘사하였으니 그런 사람도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벼루에 먹을 갈아서 팔을 들어 먹물을 뭍힌 붓으로 한획 한획 한자를 멋있게 쓰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지금은 볼펜으로 뜻만 알수 있게 끄적거리며 쓰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병연이 붓으로 시간을 들여 쓴 글을 우리는 페이지 하나를 단숨에 읽어 내려 가고 있으며, 한자는 그때도 쓰기 어려웠지만 읽지 못하고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훈장이 요산요수(樂山樂水) 읽는 법도 몰랐다고 하니 . .
그때 언문 취급 받던 한글은 이제 한자를 몰아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방랑기의 한시를 읽으면서 그러한 한자가 지금 세상에서도 필요한가에 대해서 나는 고민하던 사람의 하나였었습니다
그가 쓴 한시는 읽을 수 있으나 문장 뜻을 알 수가 없었고 때로는 어려운 한자, 이따금 모르는, 사전으로 찾기도 쉽지 않은 한자의 벽에 부딛히며 이제 잘 쓰지 않는 한자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만 결국 한자를 배우는 것이 우리들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자는 글씨 한 자, 한 자에 뜻이 들어 있고 그런 글자들이 모인 글자로서 예를 들면 '시', '여', '예', '한' 등으로 한글로서 글자 한 자만 써 놓으면 그 의미를 알수 없지만 詩, 女, 禮, 恨 같이 한자로 쓰면 간단하면서도 쉽게 그 뜻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뜻의 전달력은 오리온 초코파이 봉지에 써진 '情' 이라는 글자 한 자의 표현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 일본 등 이웃 나라와 더 가까이 할 수도 있으며 역사 연구, 고전에 도움이 됩니다
물론 한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갈수록 획수가 많아지고 어려운 글자도 만나게 되는데 우리 글의 표현 범위를 넓히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사용하고 그 숫자를 제한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김삿갓은 안동 김씨로 몰락했지만 양반집 자제로 머리 만큼은 뛰어나서 당시에 통용되던 언문(우리말) 시와 한시에 능하여 풍월을 읊으며 부모덕에 행세하는 양반 자제들, 잘난 척하는 자들과 겨루며 혼 내주고, 때로 한시를 아는 사람들의 대접을 받고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전 여행을 하는데 기암괴석 금강산을 구경하고 안변에서 동해바다도 보고, 대동강과 평양, 그리고 강계의 압록강변까지 가면서 그가 남기는 세세한 표현으로 보아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렇게 표현할 수가 없을 것 처럼 보입니다
먹을 만드는 노인의 장인정신을 보고서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는 학문에 종사하는 선비만을 지극히 존중해 왔다
그러면서 집을 잘 짓는 기술자는 목수장이, 토목 일을 하는 사람은 미장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환장이,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을 노름장이 등등의 이름으로 천대해 왔다
이러니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나라가 기술적 발전을 하기 어려웠다
이래서는 안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타고 난 재주를 십 분 발휘하여 여러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백성이 살기 좋아지고 나라가 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당시 양반 상놈으로 나뉘고 또한 사농공상 순서로 우대하고 천대하는 잘못된 상황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영월에서 시작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 나라를 돌아 다니며 기록으로 남겨서 그때의 모습과 생활상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1차 방랑>
영월 -> (5) 500리, 단발령 -> (5) 100리 금강산 비로봉, 내금강 -> (19) 100여리 외금강(해금강),-> (20) 함경도 통천(通川) -> (21) (이백 오십리, 안변) (23) 강원도 함경도가 접한 곳 -> (25) 안변 학성산 가학루에서 동해를 봄 (33)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 (42) 문천 -> (함흥) -> (46) 단천 -> (45) 길주((吉州) 명천(明川) <-> (48) 안변 -> (49) 영월
<2차 방랑>
(53) 제천 -> (58) 원주(原州) -> (58) 여주 신륵사 강월헌 여강(驪江) -> (59) 이천 -> 광주, 남한산성, -> (61) 광나루 수구문(水口門:光熙門) 한양 종로 육의전 남산 인왕산 세검정 무악재 -> (63) 파주 -> (65) 벽제관, -> (66) 장단(長湍), -> (67) 개풍(開豊), -> (68) 개성 진봉산, 선죽교(善竹橋) 송악산 만수산 -> (70) 예성강(禮成江), 황해도 금천,-> (73) 신계 100여리 곡산 읍내, 60여리 천동마을, 감둔산(甘屯山) -> (97) 사리원 황주(黃州). 봉산(鳳山). 신천(信川). 안악(安岳), -> (100) 구월산(九月山) 은률(殷栗) -> (101) 해주(海州) -> (120) 황해도와 평안도 사이, 희환산-> (123) 대동강 나루터, 평양 금수산 을밀대(乙密臺), 능라도, -> (140) 평안도 안주(安州) -> (145) 순천 -> (153) 정주(定州), 선천(宣川) -> (159) 영변(榮邊), 약산동대(藥山東臺), -> (166) 묘향산, -> (170) 적유령 고개 -> (181) 강계 압록강변 수강정(受降亭) 태수정(太守亭)
※ (괄호)는 방랑기 시리즈 번호임
읽으면서 남북이 서로 갈라져 뇌리에서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안변의 동해에서 금강산 그리고 대동강, 강계 압록강변까지 묘사한 김삿갓의 방랑기를 보면서 바람을 피울 때는 내 몸의 청춘도 조금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 ! 거기도 우리 땅이었었구나' 하고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그때는 갈수 있었던 북한의 이곳 저곳과 선조들의 여러 생활상들을 알려 주었는데 어릴때 우리는 철로에 기차 다니고 전기가 들어 오기는 했지만 시골에서 사는 모습은 그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초가집과 물 맑은 강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것도 . .
어렸을 때 2년 연배인 동네 선배는 다들 다니는 국민학교에 가질 않고 이웃 동네 서당으로 다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거기서 '하늘 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하며 천자문을 배웠겠지요
삿갓 시대는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합격하거나 조정의 배경에 의하여 관리로 임명되어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알고 한문시를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로운자 이겠지만 한문 실력만으로 어떻게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 .
관리가 지방을 잘못 관리하고 자기 욕심만 챙기면 관아를 얕보면서 김병연 할아버지와 관련되는 홍경래, 후에 전봉준과 같이 봉기하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중국이 옆에 있는 전반적으로 느슨한 사회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이웃 나라는 칼만 차고 있으면 무서운 것이 없고 주군 위해 목숨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섬 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 서로 싸우다가 하나로 통일되어 쓸모없는 군대를 여새로 임진왜란 일으킨 후 여러 지방 세력권자인 다이묘들을 거느리며 다스리고 무력이 집중되는 최고 권력자의 대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씨받이를 위해 궁중에 '금남(禁男)의 공간'을 만들어 정실과 측실, 시녀 등 쇼군만을 위한 여성 1000여명이 노출 안되게 모여 살던, 무사들은 항상 칼을 차고 다니는, 죽으면 화장하며 묘지가 없는, 서민 삶이 고달픈 엄격한 사회인데 비하여 . .
그 시절 김삿갓은 과거에 합격했던 똑똑한 사람으로 풍류를 즐기며 시로서 잘 표현하고 풍자하여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으며 구경하면서 산과 강 시골, 산골길을 걸어 다니면서 남은 거리도 나타내고 경치를 세세하게 잘 묘사하였으니 그런 사람도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벼루에 먹을 갈아서 팔을 들어 먹물을 뭍힌 붓으로 한획 한획 한자를 멋있게 쓰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지금은 볼펜으로 뜻만 알수 있게 끄적거리며 쓰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병연이 붓으로 시간을 들여 쓴 글을 우리는 페이지 하나를 단숨에 읽어 내려 가고 있으며, 한자는 그때도 쓰기 어려웠지만 읽지 못하고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훈장이 요산요수(樂山樂水) 읽는 법도 몰랐다고 하니 . .
그때 언문 취급 받던 한글은 이제 한자를 몰아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방랑기의 한시를 읽으면서 그러한 한자가 지금 세상에서도 필요한가에 대해서 나는 고민하던 사람의 하나였었습니다
그가 쓴 한시는 읽을 수 있으나 문장 뜻을 알 수가 없었고 때로는 어려운 한자, 이따금 모르는, 사전으로 찾기도 쉽지 않은 한자의 벽에 부딛히며 이제 잘 쓰지 않는 한자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만 결국 한자를 배우는 것이 우리들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자는 글씨 한 자, 한 자에 뜻이 들어 있고 그런 글자들이 모인 글자로서 예를 들면 '시', '여', '예', '한' 등으로 한글로서 글자 한 자만 써 놓으면 그 의미를 알수 없지만 詩, 女, 禮, 恨 같이 한자로 쓰면 간단하면서도 쉽게 그 뜻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뜻의 전달력은 오리온 초코파이 봉지에 써진 '情' 이라는 글자 한 자의 표현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 일본 등 이웃 나라와 더 가까이 할 수도 있으며 역사 연구, 고전에 도움이 됩니다
물론 한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갈수록 획수가 많아지고 어려운 글자도 만나게 되는데 우리 글의 표현 범위를 넓히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사용하고 그 숫자를 제한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김삿갓은 안동 김씨로 몰락했지만 양반집 자제로 머리 만큼은 뛰어나서 당시에 통용되던 언문(우리말) 시와 한시에 능하여 풍월을 읊으며 부모덕에 행세하는 양반 자제들, 잘난 척하는 자들과 겨루며 혼 내주고, 때로 한시를 아는 사람들의 대접을 받고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전 여행을 하는데 기암괴석 금강산을 구경하고 안변에서 동해바다도 보고, 대동강과 평양, 그리고 강계의 압록강변까지 가면서 그가 남기는 세세한 표현으로 보아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렇게 표현할 수가 없을 것 처럼 보입니다
먹을 만드는 노인의 장인정신을 보고서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는 학문에 종사하는 선비만을 지극히 존중해 왔다
그러면서 집을 잘 짓는 기술자는 목수장이, 토목 일을 하는 사람은 미장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환장이,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을 노름장이 등등의 이름으로 천대해 왔다
이러니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나라가 기술적 발전을 하기 어려웠다
이래서는 안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타고 난 재주를 십 분 발휘하여 여러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백성이 살기 좋아지고 나라가 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당시 양반 상놈으로 나뉘고 또한 사농공상 순서로 우대하고 천대하는 잘못된 상황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영월에서 시작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 나라를 돌아 다니며 기록으로 남겨서 그때의 모습과 생활상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1차 방랑>
영월 -> (5) 500리, 단발령 -> (5) 100리 금강산 비로봉, 내금강 -> (19) 100여리 외금강(해금강),-> (20) 함경도 통천(通川) -> (21) (이백 오십리, 안변) (23) 강원도 함경도가 접한 곳 -> (25) 안변 학성산 가학루에서 동해를 봄 (33)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 (42) 문천 -> (함흥) -> (46) 단천 -> (45) 길주((吉州) 명천(明川) <-> (48) 안변 -> (49) 영월
<2차 방랑>
(53) 제천 -> (58) 원주(原州) -> (58) 여주 신륵사 강월헌 여강(驪江) -> (59) 이천 -> 광주, 남한산성, -> (61) 광나루 수구문(水口門:光熙門) 한양 종로 육의전 남산 인왕산 세검정 무악재 -> (63) 파주 -> (65) 벽제관, -> (66) 장단(長湍), -> (67) 개풍(開豊), -> (68) 개성 진봉산, 선죽교(善竹橋) 송악산 만수산 -> (70) 예성강(禮成江), 황해도 금천,-> (73) 신계 100여리 곡산 읍내, 60여리 천동마을, 감둔산(甘屯山) -> (97) 사리원 황주(黃州). 봉산(鳳山). 신천(信川). 안악(安岳), -> (100) 구월산(九月山) 은률(殷栗) -> (101) 해주(海州) -> (120) 황해도와 평안도 사이, 희환산-> (123) 대동강 나루터, 평양 금수산 을밀대(乙密臺), 능라도, -> (140) 평안도 안주(安州) -> (145) 순천 -> (153) 정주(定州), 선천(宣川) -> (159) 영변(榮邊), 약산동대(藥山東臺), -> (166) 묘향산, -> (170) 적유령 고개 -> (181) 강계 압록강변 수강정(受降亭) 태수정(太守亭)
※ (괄호)는 방랑기 시리즈 번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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